‘머리 치워, 머리 앞 좀 보게 치워’ 2000년대를 강타한 ‘틴틴파이브’의 대표곡 ‘머리 치워 머리’의 한 대목이다. 1993년 SBS 공채 개그맨 2기로 데뷔한 이동우는 김경식, 표인봉, 이웅호, 홍록기와 함께 그룹 '틴틴파이브'를 결성해 코미디와 음악을 넘나들며 인기를 얻었다. ‘로보캅’과 ‘아카펠라 개그’로 수준 높은 무대를 선보였고, 빼어난 가창력과 춤 실력으로 1세대 아이돌 사이에서도 음악 차트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개그맨 이동우가 있었다.
2010년, 그는 마흔의 나이에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방송과 무대, 그리고 책을 매개로 세상과의 연결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을볕이 따스하게 스며들던 어느 오후, 여전히 무대 위에 서 있는 개그맨 이동우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망막색소변성증 : 빛, 색, 형태 등을 인식해 뇌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망막에 색소가 쌓여 망막의 기능을 잃는 유전성 질환
“욕심을 쫓다 보면 관계가 복잡해져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첫 질문에 그는 유쾌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비교적 만족스럽게,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잘 지낸다’는 건, 단순히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욕심과 번민으로 흔들리지 않고, 내면이 고요하고 편안할 때 느끼는 만족감이다.
“내 귀가 조용한 것도 중요하지만, 속이 조용해야 해요. 욕심을 쫓다 보면 관계가 복잡해지고, 오해나 억울함 같은 감정이 쌓여서 속이 더 시끄러워지거든요. 인간관계를 단출히 하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조짐이 보이면 과감히 거리를 두어요. 그러면 훨씬 조용해지죠.”
무대를 누비며 수많은 관객과 함께 웃고 떠들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그는 ‘정서적인 고요함’을 추구한다. 가까운 사람들과는 자주 소통하지만, 불필요한 소음과 번잡은 기꺼이 거리를 둔다. 덕분에 그는 하루의 에너지를 꼭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게 되었다.
흰지팡이, 삶을 이끄는 또 하나의 눈
그의 곁에는 늘 흰지팡이가 있다. 10월 15일은 시각장애인의 보행권을 보장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제정된 '흰지팡이의 날'이다. 흰지팡이는 단순한 막대기가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장애물이나 지면의 변화를 탐색하는 도구이며,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흰색 지팡이는 오직 시각장애인만 사용할 수 있다. 개그맨 이동우에게 흰지팡이는 어떤 의미일까?
시력을 잃은 뒤, 그는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야 했다. 그중 하나가 걷는 법이었고, 처음에는 흰지팡이가 낯설고, 불편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에는 ‘정말 평생 이걸 잡고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결국 흰지팡이는 제 눈이자, 삶을 이끄는 힘이 되었죠. 지팡이만 따로 놓고 보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존재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크게 이끄는지는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요.”
이제 그의 삶에서 흰지팡이는 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여행 가방에는 항상 여분의 지팡이를 챙기고, 집안에도 침대 머리맡이나 거실 쇼파 옆처럼 손이 닿는 곳곳에는 늘 흰지팡이가 있다. 하지만, 일상의 일부인 것처럼 익숙해지기까지에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흰지팡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 복지관이나 관련 기관에서 체계적인 보행 교육을 받는다. 처음에는 똑바로 걷는 연습을 하고, 다음에는 건물 내부를, 나아가서는 밖에서 길을 따라 걷는 법을 연습한다. 평소 운동 신경이 좋은 그는 비교적 쉽게 익혔다고 하지만,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대신 흰지팡이를 선택한 이유도 남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고양이와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심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안내견과 헤어져야 할 순간을 상상하기가 두려웠어요.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결혼 3개월 만에 찾아온 아픔의 시간
올해로 결혼 22년 차를 맞은 그는 2003년 12월,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은 길지 않았다. 그 뒤로 3개월 뒤인 2004년 초, 그는 난치성 유전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을 진단받게 되었다. 서서히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결혼한 지 불과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 그는 아내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당시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아픔이나 슬픔도 감당할 만해야 서로 위로하고 벗어나려 애쓰는 건데, 그 고통의 크기가 너무 크다 보니 말문이 턱 막히더라고요. 같이 있어도 정작 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아내와도, 가족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어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를 힘들게 했다. 당연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이 어느 날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힘듦의 터널 끝에서, 아내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자신의 장애를 세상에 공개하고, 책을 쓰고,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했으며, 연극과 영화 무대에 섰다. 나아가, 재즈 보컬리스트로 단독 콘서트까지 열고, 강연으로 더 많은 이들과 만났다. 그 곁에는 언제나 아내가 있었다.
지금은 아내와 어떤 대화를 자주 나누냐는 말에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서로 까불면서 살아요. 거의 매일 장난을 치고, 애들처럼 놀기도 하죠. 남들이 보면 ‘저 사람들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그렇게 웃고 떠들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금세 무거워지거든요.”
사랑을 전하기 가장 좋은 순간
개그맨 이동우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뒤로 사랑을 보게 됐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전에는 봐야 할 것, 현혹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것이다.
“눈을 감게 되면 그 모든 것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요. 그러다 보니 이전에는 다른 것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사랑이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더군요. 떠날 사람은 떠나고, 곁에 남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나를 안아줄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죠.”
그는 시력을 잃고 나서야 곁에 남은 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소식보다 서로 돕고 살리며 함께하는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왜 나는 예전엔 이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오랜 친구인 개그맨 김경식과는 매일 아침 문자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는 되레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떻게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애정 표현할 수 있냐는 반응이 너무 많아서 사실 되게 의외였어요. 저희 사이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거든요. 오히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다들 어떻게 살기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현을 할까?’ 라고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표현할 수 있을 때 해야죠. 특히 좋은 날, 좋은 소식이 있을 때, 그 순간이 바로 사랑을 전하기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해요.”
책과 사람을 잇는 ‘우동살이’
그의 또 다른 무대는 친구 김경식과 함께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우동살이(우리가 동화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책 낭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라이브 방송을 통해 구독자들과 소통한다. 수익을 위한 채널이 아니라, 오롯이 마음을 나누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다. 정해진 시간 없이 불시에 진행되곤 하지만, 국내뿐 아니라 미국, 유럽 등 해외 각지에서 접속하는 구독자들 덕분에 채널은 작은 공동체처럼 자라나고 있다. 구독자층은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며, 대부분은 이곳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새로운 인연들이다. 최근에는 처음으로 구독자들과 오프라인 만남을 가졌다. 그 가운데 프랑스에서 온 팬과의 만남은 그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남겼다.
사진 출처 : 유튜브 채널 ‘우동살이’
“스무 분 정도 초대했는데, 프랑스에서 오신 분이 계셨어요. 알자스라는 지방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고 하셨어요. 일이 있어서 한국에 왔다가 정모 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오셨죠.”
이제 ‘우동살이’는 단순히 책을 낭독하는 채널이 아니다. 각자의 삶을 얹어 이야기를 나누는, 또 하나의 따뜻한 장이 되고 있다.
“책의 한 구절을 읽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얹어서 이야기를 나눠요. 그러다 보면 대화가 깊어지고, 서로의 사연에 공감하며 위로를 얻죠. 그 자체가 참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에요.”
화면해설, 모두를 위한 또 다른 무대
그는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와 <더 인플루언서> 등의 화면해설에 참여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얼마 전에는 <흑백요리사 시즌2> 녹음도 마쳤다고 한다.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화면의 내용을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콘텐츠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내레이션과 달리, 듣는 사람이 장면을 그릴 수 있도록 섬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그가 녹음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바로 발음과 호흡이다. 또한, 녹음 현장에서 원고에 빠진 부분을 발견하면, 제작진에게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사진 출처 : 넷플릭스
“화면해설은 단순히 보이는 걸 설명하는 게 아니에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내용들을 짚어줘야 하죠. 장면이 그려질 수 있도록요. 예를 들어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이라면, 단순히 밥을 먹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음식을 먹는 지도 함께 말해줘야 하죠. 이러한 설명들이 빠지면 오히려 더 답답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럴 땐 녹음을 멈추고 제작진에게 수정을 요청하기도 했어요.”
<흑백요리사 시즌2>를 먼저 본 소감에 대해 묻자, “이번에도 재미있으니까 한번 보세요.”라고 귀띔을 해주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설명을 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함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같은 장면에 함께 웃고, 같은 타이밍에 감탄하도록 돕는 일. 그는 그 다리를 더 촘촘히 놓기 위해 오늘도 호흡을 고른다.
‘만족’을 가꾸는 삶
평소 그가 자주 쓰는 단어는 ‘만족’이다.
“조용히 살아갈 수 있는 일상,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순간, 이런 게 만족스러워요. 세상에 나만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면 슬퍼지지만, 반대로 일상 속에서 작은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 되죠.”
최근 그는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언젠가 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글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에요. 하지만 독자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쓰고 싶어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꾸준히 써보려고 하고 있어요.”
그의 책을 손에 쥐게 될 그 날이 기다려진다. 힘든 시간을 지나온 그의 발걸음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따뜻한 빛이 되고 있다.
기획 : 김주현, 조경헌
사진 : 홍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