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 모델은 ‘국내 최초 휠체어 모델’로 손꼽힌다. 2017년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서울패션위크에서 스트리트 패션을 선보였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모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 광고 모델 활동, 연극 및 영화, 방송 출연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는 ‘국내 1호 휠체어 모델’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모델 겸 크리에이터’로, 더 나아가 그저 ‘김종욱’이라는 세 글자로 이름을 알리고 싶다고 얘기한다.
처음으로 내가 고른 옷
“안녕하세요. 저는 모델 겸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뇌병변장애가 있는 96년생 김종욱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히 소개하는 김종욱 모델.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 눈에 띈다. ‘모델’과 ‘크리에이터’ 그리고 ‘뇌병변장애’라는 단어들은 얼핏 낯선 조합처럼도 보이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오늘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평범한 대학생에서 모델이 되기까지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온 그다.
그가 패션을 만난 건 우연한 계기였다. 대학에 진학한 뒤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거나 배달 음식을 먹으면서 늘어난 체중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며 감량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전까지는 가족들이 골라주는 대로 옷을 입어왔지만, 처음으로 온라인 스토어에 접속하여 마음에 드는 옷을 구매했다.
“대학에 가니까 술자리도 많고 모임도 늘어났어요. 그러다니 보니 음식을 많이 먹게 되는데, 움직임은 적으니까 살이 확 찌더라고요. 제가 뇌병변장애가 있어 휠체어를 타니까 이동할 때면 친구들이 도와줬거든요. 체중이 무거워지니 도와주는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거예요. 그때 한 친구의 잔소리를 듣고 다이어트를 시작했죠.”
주변에 옷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첫 쇼핑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옷을 고르는 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계를 맞닥뜨리기도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옷을 입으면서 생긴 변화도 분명했다.
“저에게는 오프라인 매장이나 온라인 스토어가 똑같아요.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 옷걸이를 넘어뜨릴까 싶어서 오프라인 매장에 가기 어렵거든요. 어차피 옷을 입어보지 못하는 건 똑같기 때문에 힘들게 직접 찾아가기보다는 온라인으로 사는 게 더 낫다 싶었어요. 사실 옷을 고르면서 한계를 느꼈어요. 당시 제가 추구했던 스트리트 스타일의 옷들은 등 쪽에 디자인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 등이 가려지기 때문에 제대로 멋을 낼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도 옷을 고르며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어요.”
나에게 잘 어울리는 색깔, 즉 퍼스널 컬러를 찾아가는 과정은 무척 재미있었다. 또한, 살을 빼고 패션에 신경을 쓰면서 생긴 변화도 있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쳐다보면 자신의 장애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옷을 갖추어 입자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 ‘내 옷이 예쁜가?’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나를 가꾸기 시작하니 같은 시선도 다르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우연히 들어선 모델의 길
온라인 쇼핑을 통해 구입한 옷을 입고 서울패션위크에 놀러 간 김종욱 모델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감각적인 스트리트 패션의 옷을 입고 휠체어를 탄 채로 현장에 온 사람은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국내 최초 휠체어 모델이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모델’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인생에 나타난 것이다. 이후 모델로서 첫 무대를 선 것은 MBC의 <우리 동네 피터팬>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장애인의 일상을 다룬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버스킹 패션쇼’라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홍대에서 버스킹 패션쇼를 했어요. 무대에 오르기 위해 많은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움직였죠. 휠체어를 들어서 계단을 오르게 해주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천막을 만들고, 패션쇼에 맞는 음향을 세팅하는 등 여러 사람이 무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어요. 그때는 첫 무대라 여유가 없었던 나머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저 이 무대를 잘 지나가자는 생각뿐이었죠.”
현재 그는 패션쇼 무대보다는 카메라 한 대를 앞에 두고 촬영하는 일이 더 많다 보니 그때와 같은 긴장감은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협업하는 사진작가와 함께 여러 작업물을 촬영하여 SNS라는 통로에 올릴 때가 많다. 이제 그의 무대는 SNS가 된 셈이다. 이 무대를 통해 더 많은 사람과 더 널리 소통하는 요즘이다.
“패션위크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 현장에서 저를 스냅 촬영했던 사진작가 중 한 분과 지금도 인연이 되어 계속 작업하고 있어요. 그분은 저를 통해서 장애에 관심을 갖게 된 셈이죠. 같이 진행했던 작품 중에 ‘휠체어 장애인 모델이 휠체어를 벗어난다면’이라는 콘셉트로 찍은 사진이 있어요. 저는 휠체어 모델로 불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저도 그냥 한 사람의 모델로 인식되고 싶거든요. 이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예요. 촬영도 즐거웠고 결과물도 좋았어요.”
그는 작업 중 촬영한 사진들을 SNS에 올렸고, 많은 사람이 ‘좋아요’로 공감했다. SNS를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장애’ 혹은 ‘장애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가진 순간이었다. 나아가 ‘김종욱’이라는 모델을 더 깊이 각인시킬 수 있었던 작업이었다.
‘국내 최초’라는 이름
그가 휠체어 모델로 유명해지자 SNS를 통해 직업 관련 문의를 해오는 사람들도 늘었다. ‘휠체어 모델이 되고 싶다’는 사람부터 ‘자신의 포즈가 어떠한지 살펴봐 달라’는 요청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문의가 귀찮을 법도 하지만, 김종욱 모델은 최대한 성심껏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좀 조심스럽기도 해요. 사람마다 장애의 특성이 다르기도 하고요. 또 저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모델이 되었지만, 모두에게 하나의 길만 있는 건 아니기도 하니까요. 제 이야기가 교과서가 되어버릴까 봐 조심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답을 해드리려고 해요. 장애인 모델 시장이 넓어져야 제가 할 수 있는 작업도 더 많아질 테니까요.”
‘국내 1호 휠체어 장애인 모델’이라는 타이틀이 부담될 때도 있었다. 그저 재미있어서 시작한 일에 ‘첫 번째’ ‘최초’라는 이름이 붙고 ‘개척자’라는 역할이 부여될 때면 불안감도 생겼다.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의 존재가 되는 일 역시 부담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푹 자고 일어나는 방식으로 걱정을 털어냈다.
“저는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는 스타일이라 스트레스를 금방 해소하는 편이에요. 우연히 시작한 모델 일이 점점 커지고 거창해지는 게 재미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부담이 될 때도 있었죠. 미국인 휠체어 이용 모델 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가끔 연락하며 지내요. 국내에서는 제가 개척자이지만, 해외에서는 같은 일을 하는 장애인 모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기분이에요.”
국내 1호 휠체어 모델로서 촬영하면서 벽에 부딪힐 때도 있다. 대부분의 촬영 스튜디오가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는 건물에 위치하다 보니 스튜디오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에 맞닥뜨렸다고 해서 포기할 그가 아니다. 실내 스튜디오 촬영이 수월하지 않자 야외 촬영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나갔다.
“모델로 활동하면서 힘든 점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첫째로는 실내 스튜디오 촬영이에요. 스튜디오가 대부분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 층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요.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저는 접근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장소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야외 촬영으로 작업물을 쌓아갔죠. 또 하나는 다이어트에 대한 거였어요. 지금은 장애인 전문 트레이닝을 받는데, 그전에는 어떻게 운동해야 할까 막막했어요. 그래서 그냥 굶는 식으로 체중을 감량했죠.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 영상을 따라 하다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은 저에게 맞는 운동법을 찾아서 관리하고 있어요.”
모두에게 편하고 멋있는 ‘어댑티브 패션’
김종욱 모델은 의류브랜드와 협업하여 어댑티브 패션(Adaptive Fashion) 의류를 선보인 바 있다. 어댑티브 패션이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모두 고려하여 디자인된 패션을 의미한다. 해외에서는 어댑티브 패션쇼가 따로 열릴 정도로 시장 규모를 갖추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김종욱 모델은 의류브랜드의 데님 팬츠 디자인에 직접 참여했다.
“데님 팬츠 하나를 완성하는 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쳤어요. 장애인에게 어떤 디자인이 편한지 디자이너에게 얘기하고 조율하는 시간도 필요했고, 공장에서도 기존과 다른 제작 방식을 도입해야 하니까 시행착오가 있었죠. 현실의 벽을 느끼기기도 했지만, 어댑티브 패션이 더 많이 시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어댑티브 패션은 장애를 고려한 옷이지만, 장애인만을 위한 옷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디자인 자문을 하면서 기능적인 면뿐만 아니라 미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댑티브 패션이 모두가 편하고 멋지게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장애인만을 위한 옷이라고 하면 비장애인은 관심을 두지 않을 거예요. 너무 특정 집단에 포커스를 맞추면 수요가 적어지잖아요. 시장이 더 확장되어야 고객층도 넓어지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어댑티브 패션을 ‘모두가 입기 편한데 멋있고 예쁜 옷’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장애, 비장애 관계없이 어댑티브 패션을 즐기면 좋겠어요.”
김종욱 모델은 누구나 원하는 옷을 입고 자신을 멋지게 표현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패션에 관심을 가져보고 싶은 이들에게 ‘일단 검은색으로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가장 무난한 컬러인 검은색을 베이스로 두고, 거기서 자신에게 맞는 컬러를 하나씩 추가해 가는 것. 또한 부가적인 디자인을 찾아보는 단계로 차츰 나아간다면 누구나 만족스러운 패션을 갖춰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옷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입는다는 점도 있지만, 사실은 본인이 만족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람들은 자기 살기 바빠서 다른 사람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잖아요. 그래서 본인이 오늘 이 옷을 입고 좀 자신감 있게 활동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의 옷만 입어도 하루가 즐거울 거예요.”
다양한 장애인 캐릭터가 등장하길
카메라 앞에 서는 모델로서 그는 모든 촬영을 즐기는 편이다. 화보 촬영을 할 때는 콘셉트에 맞는 표정 연기가 필요한데 평소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연기연습을 한다. 짧은 시간에 음악을 표현하는 뮤직비디오처럼 화보 역시 단 몇 장의 사진으로 옷의 느낌을 보여주는 작업이기에 공통점이 많다.
“런웨이의 모델들은 보통 무표정한 채로 워킹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화보 촬영의 경우에는 콘셉트에 어울리는 표정 연기가 요구되죠. 평소에 음악을 좋아해서 뮤직비디오를 자주 보는데요. 노래를 들으면 가수가 연기했던 표정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따라 해보게 되더라고요. 잘 안 쓰던 표정 근육을 움직여보는 일도 재미있어요.”
모델의 일도, 영상을 재미있게 찍어 올리는 크리에이터의 일도 연기가 밑바탕이 되었을 때 더 좋은 작업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김종욱 씨는 연기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관심을 갖는다. 특히 우리나라의 미디어에서 비추어지는 장애인 캐릭터들에 대해 생각하고, 더 나은 방향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나 영화 등 미디어에서 보이는 장애인 캐릭터들은 대부분 불쌍하거나 착한 역할들이 많은 것 같아요. 좀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면 어떨까 상상해 봐요. 예컨대 장애를 가진 빌런 역할은 어떨까요? 장애 특성을 가지고 히어로물을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또는 장애를 다루되 더욱 현실성 있는 스토리라도 좋을 것 같아요. 언젠가 새로운 장애인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미디어에서 비추어지는 장애인의 모습은 사회적인 인식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더욱 다양한 장애인 캐릭터들이 미디어에 등장한다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채로워질 것이다. 뇌병변 장애인으로서 모델이 된 김종욱 씨 또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넓혀준 새로운 캐릭터다.
휠체어 모델, 아니 그냥 ‘김종욱’
김종욱 모델은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모델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회복지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지점은 사회복지사가 되어서 이루고 싶었던 일을 지금 그가 모델이 되어서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다양한 복지 혜택을 더 많이 알리고 싶어서였어요. 복지 정보가 있어도 잘 몰라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고요. 그래서 복지 정보를 더 많이 알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회복지사를 꿈꿨어요. 그런데 지금 모델이자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분들에게 장애와 복지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에게 마이크가 생겼으니까요.”
나로 인해 꿈을 키우고, 위로를 받고, 장애인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모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김종욱 모델. 자신을 통해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니 장애를 더 잘 알리고 싶다는 욕심도 생긴다고 한다. 그럴 때 가장 힘이 되는 건 가족의 응원이다.
“제가 모델이 된다고 했을 때 ‘뭐 어디까지 하나 보자’하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가족들은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봐’하고 응원해 주었죠. 사실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불규칙한 수입을 가진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이 걱정될 수 있잖아요. 특히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의 미래를 두고 늘 많이 걱정하시니까요. 그런데 저는 가족들에게 응원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20대 내내 하고 싶은 일들을 최대한 할 수 있었어요.”
‘휠체어 모델’, ‘뇌병변 장애인’은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수식어가 없어도 인증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저 ‘김종욱’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 말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을 그저 ‘장애인’이라는 카테고리에 가둬두지 않고,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과 그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될 때 그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다. 장애인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고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 김종욱 모델은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설 것이다.
기획 : 김주현, 남궁소담
사진 : 홍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