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주 의사에게는 ‘윙크 의사’라는 별명이 있다. 사고로 한쪽 눈을 다친 뒤 부어 있는 모습을 보고 ‘마치 24시간 윙크하는 사람 같다’며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특징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적극 활용하는 중이다. 윙크 의사라는 별명처럼 환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요즘. 의사와 환자, 장애인와 비장애인이라는 경계에서 인생을 탐구하고, 나아가 세상과 소통하는 서연주 의사를 만나 보았다.
단 몇 시간 만에, 의사에서 환자가 되다
2022년 11월의 어느 평범한 주말, 하루 걸러 하루 당직을 서는 바쁜 일과 속에서 짬을 내어 강원도의 한 승마장을 찾았다. 초보인 그에게 배정된 것은 가장 순한 말. 부드러운 손길로 말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안타까운 낙마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강원도의 병원에서 자신이 일하는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이송된 것이다. 의사로 일하던 병원에 응급환자로 찾아오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고 일하던 동료들에게 몸을 맡긴 채로 응급 수술을 받았다. 2시간 반 정도의 수술이 끝난 후 왼쪽 안구가 파열되었고, 감염 정도가 심하면 오른쪽 눈마저 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 20일 만에 퇴원하게 되었지만, 1년 6개월여 동안 무려 7번의 수술을 받으며 계속 관리를 해야 했다. 1차로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갔던 날을 서연주 의사는 또렷이 기억난다고 말한다.
“제 자취방이 병원 5분 거리에 있었거든요. 너무 바쁘게 당직을 서면서 일하니까 병원 가까운 곳에 살자는 마음으로 자취방을 구했던 거였죠. 집으로 돌아가니 사고가 일어나던 날에 돌려놓고 간 빨래가 젖은 상태 그대로 세탁기에 있더라고요.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두 눈으로 의사 가운을 입고 일하던 병원에서 환자로서 수술을 받고, 이제 한 눈으로 자취방에 돌아왔으니까요.”
퇴원하는 것은 너무나 큰 두려움이었다. 달라진 모습으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일이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까지 의사로서 환자들에게 했던 설명들을 되돌아보면서 용기를 내어 부딪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꿈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면 잔인한 현실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 등록하던 날
법적으로 장애 등록을 하던 날, 서연주 의사는 신청서를 앞에 두고 고민을 했다. 장애 등록증에 낼 사진 때문이었다. 사고 이전의 사진이 장애 등록증에 붙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러한 복잡한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담당 공무원은 사진은 나중에 바꿀 수 있다며 등록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장애’라는 두 글자를 마냥 회피하기에는 이미 일어난 너무 커다란 사건이었다. 사고 6개월이 되었을 때 장애 등록을 하고 ‘장애인’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사소한 불편을 느낄 때도 많았다. 예를 들면 생일 케이크에 초를 붙일 때 불이 붙지 않았던 일, 길을 걸을 때면 왼쪽 어깨를 부딪히는 상황이 잦았던 일. 처음에는 그저 자신이 조심성이 없어서 그렇다며 자책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은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연습을 할 때 제가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직업으로의 복귀였고, 두 번째는 운전이었죠. 일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료를 하면서 업무에 복귀했죠. 그다음은 이동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운전을 시작했어요. 사고 이후 운전 연습도 다시 하고 연수도 받고 했는데, 자꾸 비슷한 종류의 접촉 사고가 일어나는 거예요. 역시 왼쪽에 사각이 있어서 사고가 일어나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좌절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기에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죠.”
도로 위에서 사고가 나면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이기에 운전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후 서연주 의사는 왼쪽의 사각을 보완하기 위해 보조 미러와 센서를 추가 설치했고, 더이상 접촉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어려움과 마주치고,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장애 이후의 삶을 배워나가는 중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던 것 같아요. 그동안은 제가 잘하는 것을 계속 발견하는 삶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제가 못하는 걸 하나씩 발견하는 삶이 될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이 그렇잖아요. 노화의 과정에서 눈도 점점 안 보이고 귀도 점점 안 들리게 될 테고요. 그것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게 인생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그 변화를 조금 더 일찍 경험해서 내 삶을 충분하게 채워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 다행이에요.”
명료함에서 모호함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마주하는 건 새롭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모든 것이 명료했던 삶에서 모호한 경계에 서게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의사이면서 환자라는 정체성, 시각장애인이지만 경증으로 구분된다는 점이 그랬다. 이 모호한 경계에서 서연주 의사는 더 많은 고민을 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는 항상 명확한 역할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모호한 걸 못 견디는 편이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 저는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의사에서 환자의 역할로, 또 환자에서 의사로 전환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그렇죠. 시각장애인에도 여러 경우가 있잖아요. 전맹인도 있고, 저시력인도 있고요. 저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단안장애인데요.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나의 장애는 중증으로도, 경증으로도 비칠 수 있겠지요. 이런 모호한 경계가 저를 고민하게 했고 성장시켜 주었어요.”
과학영재고등학교에서 카이스트로, 다시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소화기 내과 전문의가 되기까지, 늘 명확한 목표와 분명한 성취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서연주 의사는 모호한 경계에 서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깨달은 일도 많다. 특히 용기라는 단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20대 때 저에게 제일 중요한 단어가 뭐였을까 생각했어요. 저는 사람, 의미, 경험이라는 단어를 골랐어요. 사람을 곁에서 돌보고 싶어서 의사라는 직업으로 진로를 변경했고, 의미를 찾기 위해서 전공과를 선택하고, 또 여러 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기여하고자 노력했고요. 취미 활동에 도전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나갔어요. 지금도 세 단어는 저에게 유효한데요. 이제는 하나의 단어가 추가되었어요. 바로 용기예요. 저에게 닥친 여러 가지 변화에 적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용기 또한 저에게 중요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장애 이후 할 수 있게 된 것
장애 이후 하지 못하게 된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 호기심, 탐구심이 많아 다양한 취미를 즐겨왔던 서연주 의사는 장애 이후에 취미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오히려 새롭게 즐기게 된 취미도 생겼다. 바로 러닝이었다.
“대학 때 수영 동아리 활동을 할 만큼 수영을 좋아했는데, 사고 이후에는 못하게 되었어요. 테니스나 배드민턴도 어려워졌죠.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편이었는데, 못하는 것들이 늘어난 거예요. 그러다가 우연히 친한 동생의 제안으로 러닝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사고 이전에 저는 러닝을 못하는 편이었는데, 러닝 첫날에 5킬로미터를 달렸죠. 장애 이전에는 30분도 연속으로 달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장애를 가진 뒤에 45분을 달린 거예요. 그 한 번의 성공 경험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어요.”
다섯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의사로서 업무에 복귀했지만, 다시 수술을 준비해야 했고,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몸도 마음도 무척 지쳐있었다. 그때 한 후배가 같이 달리기를 하자며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후배는 천천히 달려도 되니까 멈추지만 말자며 응원했고, 그렇게 5킬로미터의 거리를 달렸다. 이 경험으로 서연주 의사는 스스로를 일으키는 힘을 배웠다고 말한다. 수술을 하고 회복하고 적응하는 일을 무려 일곱 차례나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내일을 준비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한편 새로운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생겼다. 얼마 전에는 장애 청년 드림팀 활동의 일환으로 스페인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고 왔다. 스페인 시각장애인의 사회 통합과 자립 과정 탐구를 주제로 연수하며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장애 등록을 할 무렵에 알게 된 전맹 시각장애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장애 청년 드림팀 활동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줬어요. 합격해서 본격적인 연수를 다녀온 거죠. 스페인에서는 장애인 복지를 일방적인 나눠줌, 그러니까 시혜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장애인 스스로가 자생 가능한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많아졌어요.”
위로의 공동체
장애 이후의 삶에 대해 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서연주 의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에세이집 <씨유 어게인>을 펴냈다. 이 두 가지는 그에게 소통의 창구이자 위로의 공간이다. 특히 유튜브 댓글 창을 통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소통하는 이들을 보면서 ‘유튜브 하길 잘했다’ 생각도 한다.
(사진 : 유튜브 채널 '윙크의사 연주당') (사진 : 김영사 제공)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보니 소통에 대한 욕구는 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고 이전부터 유튜브를 개설하고 운영했어요.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낙마 사고가 발생한 거죠. 사고 직후, 유튜브를 같이 운영하던 친구가 몸을 챙기는 게 우선이라며 활동을 말렸지만, 저는 이 상실의 시간을 보다 가치 있게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시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게 되었죠.”
사고 이전에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주로 유튜브에 담았다. 의사 역시 남들과 똑같이 고민하고 좌절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자연스레 보여줬다. 사고 이후에는 힘든 시간을 기록하는 도구가 되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며 힘들었던 일들과 그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유튜브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제 콘텐츠를 봐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따뜻한 사람들 덕분이에요. 제가 올리는 콘텐츠를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고 말씀해 주기도 하는데요. 사실은 제가 더 많은 위로를 받고있는 것 같아요. 따뜻한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어 무척 감사하게 생각해요.”
의안을 시도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올렸을 때,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의안을 할지 고민하는 사람, 의안을 한 지 5년 된 사람, 딸에게 의안을 해주려고 하는 사람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고 위로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글을 올렸다. 각자 다른 경험과 시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따뜻한 위로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윙크의사 서연주의 유튜브는 그래서 소통과 교류, 위로의 창이 되었다.
의안 : 실명한 사람의 자연 안구를 대체하는 인공 안구를 말함
마음으로 공감한다는 것
서연주 의사는 공감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의사로, 또 환자로 지냈던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한 공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에게 중요한 키워드는 공감이었다.
“공감할 수 있는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머리로 다짐하는 것과 직접 환자의 입장이 되어 경험하게 되는 것은 조금 다른 얘기인 것 같아요. 환자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학생 때 배우면서도 알았지만, 환자로 병원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직접 느끼게 된 게 있죠. 의사로서 어떤 진료행위를 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소한 말 한마디로 위로를 주는 일 또한 대단히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병원이라는 공간은 치열하다. 의사들은 혼신의 힘을 쏟으며 진료하고, 환자들 역시 병과 싸우며 고군분투한다. 각자가 치열한 전쟁을 치르기에 병원은 때로는 삭막하고 차갑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서연주 의사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환자들에게 따뜻한 안부 인사를 건네는 의사이고 싶다고 말한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들었던 위로의 말을 자신의 환자들에게도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이름
서연주 의사는 앞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정체성으로 삶을 살아가겠다고 이야기한다.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 상처와 흉터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치유를 전해줄 수 있는 의사이자 장애인, 또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한 외과 선생님이 저를 보면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게 내가 살아갈 앞으로의 방향이구나 싶었어요. 저 역시도 여러모로 상처를 많이 입었지요.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 상처를 숨기고 괜찮은 것처럼 지내는 것뿐이죠. 하지만 저는 제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저의 힘듦과 고민을 노출하면서, 저 스스로를 치유하고 싶어요. 더 나아가서는 흉터를 드러내는 저의 모습을 통해서 더 많은 분에게 치유의 힘을 드리고 싶죠. 사고나 신체적인 질병으로 힘든 상황에 놓이신 분들이, 저를 보면서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다면 좋겠어요.”
서연주 의사는 말한다. 장애로 한쪽 시야가 좁아졌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오히려 넓어졌다고. 그래서 장애를 받아들이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장애가 고맙다는 생각도 한다고. 장애를 또 다른 경험의 토대로 승화시키고 삶에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기에, 더 넓은 시야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장애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세상을 더 넓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작,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 시작, 나의 삶을 고민하고 우리 사회를 더 이롭게 하는 시작 말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시작하는 서연주 씨의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