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당뇨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 자가면역질환으로 인해 스스로 인슐린을 생산할 수 없게 된 1형 당뇨 환우들이다. 아들이 1형 당뇨에 걸려 환우 가족이 된 김미영 대표는 하루에도 수십 번 혈당을 체크하고 인슐린을 주사해야 하는 환우들에게 평범한 일상을 돌려주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이어 왔다. 지난 10년에 걸쳐 1형 당뇨 환우들의 삶의 질이 크게 높아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1형 당뇨
흔히 당뇨는 비만, 운동 부족, 나쁜 식습관 등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식이요법과 운동을 충분히 병행했음에도 한순간 당뇨에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1형 당뇨로 고생하고 있는 환우들이다.
당뇨는 1형 당뇨와 2형 당뇨로 나뉜다. 2형 당뇨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당뇨병으로, 인슐린 분비량의 저하로 인해 발생한다. 반면 1형 당뇨는 어느 날 갑자기 인슐린 분비가 중단되는 당뇨병이다. 면역시스템이 인슐린 분비에 관여하는 췌장 내 베타세포를 공격하는 자가면역반응으로 인해 순식간에 당뇨 환자가 되는 것이다.
한국1형당뇨병환우회를 이끌고 있는 김미영 대표도 2011년까지는 여느 사람들처럼 1형 당뇨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2012년 1월 아들이 1형 당뇨 진단을 받자 앞이 더욱 깜깜했다. 매우 까다로운 혈당 관리도 김미영 대표 모자를 지치게 했다. 한 달 동안 10cc 미만의 인슐린을 하루 10회 이상, 한 달에 300회 이상 주사해야 했다. 하루 10번씩 혈당을 면밀하게 체크하지 않으면 저혈당 혹은 고혈당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저혈당과 고혈당 모두 환자의 생명에 직간접적인 위협이 되기에, 관리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아이가 심각한 저혈당으로 인해 잠깐 의식을 잃었던 때도 있었다. 급히 주스를 마시게 해서 혈당을 회복했지만, 깨어난 아이는 주스를 마신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1형 당뇨 환우들과 가족들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상을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저희 아들은 네 살 때 스스로 채혈을 했고, 다섯 살에는 자기 배에 직접 주사를 놨어요. 어린이집을 다니려면 어쩔 수 없었죠. 성인들도 힘들어하는 일을 자식이 스스로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운이 좋았어요. 간호사가 있는 어린이집에서 아이의 몸 상태를 수시로 돌봐 줬고, 야근이 있을 때는 주변에서 아이를 적극적으로 돌봐 주셨으니까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다
김미영 대표는 2013년부터 국내외 1형 당뇨 커뮤니티에 가입해 어떻게 질환을 관리하고 있는지 공부했다. 국내 환우 가족들과 정보를 교류하고 상부상조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한 회원이 황당한 일을 겪었다.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자식이 어린이집에 입소했는데, 간호사가 아이에게 주사 놓기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엄마가 때마다 직접 와서 혈당을 체크하고 주사를 놓겠다고 하자,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성을 거론하며 이 방안도 거부했다. 사실상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식을 들은 회원들은 어린이집의 부당한 처우에 분노했고, 1형 당뇨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서기로 했어요. 하지만 당시 커뮤니티 운영자는 이러한 움직임에 소극적이었고, 이에 실망한 회원들은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 대응에 나섰습니다. 1형 당뇨를 앓는 아이들이 간호사가 상주하는 국공립어린이집에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으며 다닐 수 있도록 영유아보호법 개정에 나선 겁니다.”
김미영 대표는 회사를 다니는 틈틈이 둘째 아이를 업고 전국을 누비며 4만 3천여 명 회원들의 자필 서명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국회의원실을 돌아다니며 법안 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발의된 법안은 2016년 1월, 국회를 통과했다. 간호사가 상주하는 국공립어린이집 입소 신청 시 소아 당뇨에 대한 가산점이 부여되어 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유아보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회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하면 된다!’는 확신으로 바뀐 순간이었죠.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키다
수시로 이뤄지는 혈당 체크와 인슐린 주사는 곧 1형 당뇨 환우들의 괴로움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자동주입기 덕분이다. 두 기기를 사용하는 환우들은 각 기기에 연결된 바늘을 피하조직이 꽂아 놓는다. 한 번 꽂으면 3~4일 동안 교체하지 않아도 된다. 바늘을 통해 연속혈당측정기는 1~5분 단위로 사용자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자동주입기는 때마다 설정한 양만큼 인슐린을 주입한다. 사용하는 내내 바늘을 꽂고 있어야 하기에 여러 불편이 따르지만, 수시로 피를 내서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을 주사하는 커다란 번거로움을 덜 수 있기에 1형 당뇨 환우들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된다.
해외 1형 당뇨 커뮤니티와도 교류하고 있었던 김미영 대표는 이 기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파악했다. 미국에 있는 지인들을 총동원해서 기기를 구매하고 써 봤더니 효과가 매우 좋았다. 매사 소극적이었던 아이가 점점 밝아졌고, 혈당 측정과 인슐린 주사를 직접 하지 않아도 되기에 집중력도 높아졌다. 이렇게 좋은 기기들을 혼자서만 사용할 수 없었던 김미영 대표는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정보를 공유했다. 많은 부모들이 기기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제품 구매가격 그대로 들여와 회원들에게 보냈다.
“당시 해외에서는 블루투스, NFC 등의 통신기술을 활용해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자동주입기를 연동하는 앱도 사용하고 있었어요. 혈당 측정치가 기준보다 높으면 스마트폰 앱을 통해 자동으로 인슐린자동주입기에 인슐린을 주입하도록 설정할 수 있어요. 반대로 혈당이 낮을 때는 인슐린 주입을 늦출 수도 있죠. 두 기기를 전달하며 이 앱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글판 가이드도 만들어 배포했어요. 그 과정에서 단 한 푼도 사익을 취하지 않았죠.”
1형 당뇨 환우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활동했지만, 관련 부처의 생각은 달랐다. 김미영 대표는 2017년 관세청과 식약처로부터 관세법 위반, 의료기기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한 치 부끄러움이 없었다. 구입 경로, 회원들과 주고받은 메일, 기기 구매 내역 등을 빠짐없이 소명했다. 언론을 통해 1형 당뇨 환우들의 어려움과 상황의 억울함을 널리 알리는 활동도 펼쳤다. 덕분에 검찰로부터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1형 당뇨의 실상과 연속혈당측정기 및 인슐린자동주입기의 필요성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형 당뇨를 앓는 아이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특별 대책이 마련됐으며, 두 기기가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 올라가는 성과도 거뒀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이었다.
편견을 넘어 모두의 건강한 미래로
1형 당뇨에 대한 세상의 인식도 훨씬 나아졌다. 김미영 대표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회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사연은 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소아 당뇨를 언급하며 아이가 게으르고 인스턴트식품을 좋아해서 걱정이라고 말하자, 반대편 사람이 “얼마 전 TV를 보니 소아 당뇨는 아이의 생활과는 관련 없이 자가면역질환 때문에 생기는 병이라고 하더라”며 선입견을 바로잡아 준 것이다.
“당시만 해도 소아 당뇨는 곧 1형 당뇨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어요. 1형 당뇨가 아이들에게서 많이 발병하기 때문인데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 1형 당뇨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바로잡았다는 소식에 큰 희망을 얻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1형 당뇨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꾸준한 인식개선활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됐죠.”
김미영 대표는 1형 당뇨 환우와 가족의 목소리에 힘을 더하기 위해 2017년 7월 한국1형당뇨병환우회를 설립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자동주입기에서 생성된 1형 당뇨 데이터를 한곳에 모아 빅데이터화하는 ‘당케DB플랫폼’을 개설했다. 최신 의료기기 및 의료정책을 설명하는 온라인 세미나를 매달 한두 번씩 꾸준히 개최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인식개선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작년 세계 당뇨병의 날에는 1형 당뇨 인식개선 캠페인 ‘소아 당뇨가 아니라 1형 당뇨입니다’를 펼쳤으며, 올해에는 코로나19 시국의 마스크 착용과 1형 당뇨를 연계해 1형 당뇨가 누군가의 잘못에 의해 생긴 병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닥친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환우들 모두가 공평하게 1형 당뇨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치료받아야 합니다. 관심과 여력이 충분한 일부 환우들만 제도와 기기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공의료화하고 공교육화함으로써 1형 당뇨 환우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치료를 받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죠. 1형 당뇨는 이제 ‘잘 관리하면 충분히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질환’이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1형 당뇨 환우들이 건강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펼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저와 한국1형당뇨병환우회는 앞으로도 열심히 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