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낸다는 것이 만만찮다는 것을 안다. 가끔은 뜻밖의 행운으로 기대하지 않은 결과도 있지만, 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할 일상이다. 특히 태생적인 조건과 경험은 일상에서 피할 수 없는 요인이며, 이를 이겨내기란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문제에 도전하고 성공해서 누리는 성취감의 치유와 실패해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함께 존재한다. 그렇다면 치유는 문제를 극복해서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인정하고 다루며 살아내는 매일의 열매이다. 이렇듯 크고 작은 조건과 문제를 다루며 살아내는 것이 치유일 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필요하다.
에세이 『눈부시게 불완전한』과 『우리의 사이와 차이』는 장애에 대한 비장애 중심적이고 권력적인 인식의 한계를 꼬집으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장애인을 인식하고, 다양한 존재 방식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기회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로서(자격)’와 ‘~로써(수단, 목적)’의 다름을 의식하여 읽어간다면, 장애를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했던 저자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책을 읽는 동안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인식을 되돌아보는 기회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장애를 극복하고 치유한다’는 환상
-『눈부시게 불완전한』, 일라이 클레어(하은빈 옮김), 2023. 9. 5.
“무슨 수로 내 떨리는 손을 지배하고 내 꼬이는 혀를 물리친다는 말인가?”(p27)
인용문은 자신이 가진 장애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목소리다. 그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장애인을 문제적인 존재로 보는 인식에 저항하며, 장애를 치유해야(어쩌면 ‘제거’ 란 단어가 적합하다)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전문가들의 담론을 비판한다. 이즈음 책을 읽는 이들도 질문을 품게 된다. 어떻게 장애가 있는 현실을 거슬러 장애가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왜 장애가 있는 게 문제란 말인가?
‘치유 담론’의 이중성
결함이 있다는 말은 ‘치유’라는 실천을 동반한다. 결함이 있으니 치유를 통한 회복을 기대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바로 치유 뒤에 숨은 폭력적 의식과 행위이다. 정작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과 선택은 존중받지 못한 채 장애는 무조건적으로 없애야 할 문제가 되고, 또 장애 제거를 ‘장애 극복’으로 여기는 방식의 ‘치유’가 실천되는 것이다. 태아에 장애가 있다면 임신 중지가 결정된다거나 각종 광고에서 말하는 음주운전이나 과로의 불행한 결과가 장애(인)인 것이 낯설지 않은 이유이다.
모든 몸-마음, 집단, 문화가 결함 있음의 틀로 욱여넣어지고, 결함이라는 단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려진다. 가해자 무리들은 결함 있음을 모욕으로 퍼붓고, 낯선 사람들은 호기심을 이겨 질문한다. 의사는 의무 기록에 결함 있음을 기록하고, 판사와 배심원은 이에 대한 증언을 듣는다. 과학자는 진리로서 탐구하고, 정치인은 정책에 써넣는다. 결함과 결함 있음은 혐오와 권력, 통제로 들끓는다.(p56)
장애가 ‘문제’ 아닌 세상을 기대하며
저자는 장애를 ‘문제’로 규정하고 장애인의 경험을 외면하는 관념과 행위에 맞서 장애가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즉, 장애가 문제 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다.
다양한 몸-마음의 차이가 존중받고 그중 어느 것도 박멸되지 않는 세계를 스치듯 본다. 평안과 고통, 안녕, 탄생, 죽음이 모두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치유는 우리에게 실로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결코 정의(justice)를 주지는 않으리라. 이 다시 설정된 세계에서, 치유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대도 많은 도구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p318)
결함의 상실은 존재하지만, 상실에 적응하는 힘 또한 실재한다. 상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삶은 또 다른 일상일 뿐이다. 저자는 “걷는다는 것은 너무 오랫동안 과대평가되어 왔다.”고 말한다. 이는 걸을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그러니 세상이 주장하는 문제에 올라서서 ‘눈부시게 불완전한’ 삶을 당당하게 인식하라고 요청한다. 불완전한 삶도 제거의 의도와 목표가 ‘없는’ 세계에서 행복하고 싶어서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를 주장하고 인정할 수 있는 ‘눈부신 불완전함’인 것이다.
관찰, 평가, 기록을 동반한 임상적 예언을 통과하는 일
-『우리의 사이와 차이』, 얀 그루에 지음(손화수 옮김), 2022. 7. 6.
출처 : 아르테(arte)
저자를 관찰해 온 의료진과 복지서비스 기관이 작성한 서류에는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담겨있다. 내용에 의하면 저자는 척수근육위축증으로 인해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고, 서른 살 넘게 생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저자는 대학교수가 되어 연구와 강의에 집중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규정했던 서류 속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내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내기 위해서 분투한 도전과 경험의 시간이고, 그를 지지했던 가족의 사랑이었다.
“나는 후속 조치가 필요한 하나의 의학적 사례로 살아가고 싶진 않다.”(p204)
의학적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그의 도전정신과 의지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장애가 있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할 수 있는 일들에 도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기 위해 노력했고, 걸을 수 없을 때는 서 있는 시간을 연장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절망하지 않고 현실과 자신을 마주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스무 살이면 모든 근육이 다 빠질 거라는 전문가의 판단에서 빗겨 설 수 있었다.
저자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느리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매일을 살아내고 있다. 신체의 변화와 한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료적 진단으로 자신의 미래를 앞지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과 경험을 쌓아온 ‘존재로서’ 살아가며, 다양한 존재 방식을 존중하는 세상이 될 거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장애에 관하여 단정하고 확정하려는 오늘과 세상에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
글 : 차희정(아주대학교 다산학부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