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작가가 당혹감과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은 독특하다. 담담하고 현실적으로 그와 아버지가 겪어나가고 있는 일상을 만화로 그리는 것. 인스타그램을 통해 시작한 이 만화는 벌써 6만 7천 명 팔로워들의 마음에 가닿았다. 인스타그램은 물론 강연, 전시회, 인터뷰를 통해 희망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박은선 작가를 그가 기획한 '사진, 그림 그리고 기록' 전시회장에서 만났다. 그는 웃으면서 말한다. ‘삶에 <장애>라는 단어가 생긴다고 해도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살아갈 뿐’이라고.
갑자기 내 삶에 들어온 ‘장애’를 기록하기 시작하다
박은선 작가는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현지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했지만,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꿈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국을 결정한 박은선 작가의 삶은 2020년 9월, 인스타툰을 시작하면서 이전과 180도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당시 박은선 작가는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만화 그리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인스타그램으로 만화를 그려보라’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고 소재를 고민하던 박은선 작가는 아버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마침 아버지가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2~3년 정도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는데, 아픈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익숙해지다 보니 처음 아프셨을 때 아버지가 느꼈을 감정이나 제가 느꼈던 감정이 희미해지더라구요. 장애를 받아들이던 과정도 흐릿해졌구요. 먼 훗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투병 과정을 회상할만한 기록이 없으면 다 잊어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에 인스타그램으로 기록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지금 아버지의 병은 감사하게도 진행이 느린 편이에요. 그래도 어쨌든 진행이 멈추는 건 아니다 보니 이제는 휠체어에 3시간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하세요. 하루에 절반 이상은 모션 베드 위에서 생활하셔야 하죠. 말씀을 못하게 되신지 오래되셨어요. 소리는 낼 수 있는데 언어의 형태로 소리를 내는 건 불가능해요. 핸드폰 문자로 대신 소통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말을 잃어갈 때의 두려움, 그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도 모두 만화로 기록했어요."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아무도 꺼내지 않는 이야기
박은선 작가가 생각하기에 그의 작품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나 겪지만 편하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보통 가족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밖으로 드러내 말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이야기라면 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아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콘텐츠로 내놓으니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메시지들을 많이 받았어요. 가족의 간병이 너무 힘들어서 때로는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누구나 겪는 감정이고, 아픈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한 번씩은 거쳐 가는 여정임을 알게 됐다고요."
박은선 작가의 SNS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데에서 나아가 유익한 정보와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역할도 조금씩 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시지는 아이가 1형 당뇨를 앓고 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였어요. 1형 당뇨는 우리가 흔히 당뇨병이라고 하는 2형 당뇨와 완전히 다르대요. 2형은 췌장이 기능을 서서히 잃어서 발생하는 건데 1형은 아예 그 기능이 처음부터 없어서 인슐린이 분비가 안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늘 관리해야 하는 건데, 일부 사람들이 ‘소아 당뇨’로만 치부한다 던지, ‘부모가 관리를 소홀히 해서 아이가 그런 병에 걸리는 게 아니냐’는 식의 인식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또 학교 다니는 친구들은 잘 관리가 안 되기도 하고요."
자료 : 긍씨 인스타그램"이 사연을 만화로 만들 때 이 병을 앓게 되신 분들이 얼마나 괴로울지 마음이 많이 쓰였어요. 그래서 마지막 컷에 1형 당뇨 환자와 가족을 대하는 가이드라인을 함께 올렸거든요. 그랬더니 간호사 독자분들이나 다른 1형 당뇨 아이 학부모님들이 ‘추가해줬으면 하는 정보가 있다’고 연락을 많이 주셨어요. 나중에 댓글이나 스토리로 그 정보를 공유를 하기도 했죠. 이 모든 과정에서 콘텐츠를 만든다는 보람도 있지만, 사람들이 좀 더 잘 알아둬야 할 정보들도 전달한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꼈어요."
장애인 복지 제도, 놀라울 정도로 많지만
자신이,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장애를 갖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근처 지방자치단체나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하면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한 번에 알려주는 ‘원스톱 지원 센터’가 있지 않을까?
실제 이와 같은 일을 경험해본 박은선 작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장애인 판정을 받고 나서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를 알아볼수록 ‘아, 이런 게 있구나’ 하며 놀랐다. 그런데 맹점도 바로 그 점에 있다고 느꼈다. ‘알아볼수록’이라는 것.
지금 내 가족의 장애가 어떤 상황에 속해 있고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한 번에 파악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정부에서도 모두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제도는 시시각각 변하는데 그때마다 일일이 복지 제도 신청자라고 새로 알리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 가족을 돌보는 입장에서 또 한 번 당혹감을 느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차별적 시선은 없었지만, 위로의 의미로 무심코 던진 지인들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뾰죡’해진 시기도 있었다고.
"언젠가 제 지인이 아버지 얘기를 듣고는 ‘어떡하니, 내가 너 같으면 살 수 없었을 거 같아’라고 한 적이 있어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당혹감’을 느꼈어요. 아버지가 장애를 갖게 되시긴 했지만, 저희의 삶이 무너지지는 않았거든요. 아버지를 돌봐드리곤 있지만, 저와 어머니는 여전히 돈을 벌고 일상을 얘기하고 밥을 먹고 평범하게 지내고 있어요."
박은선 작가는 ‘내가 가여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된 건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장애인의 가족다움’이 사회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였다. 가족 중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가족은 여행도 가지 않아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서도 안 되며 성격이 밝아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장애인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보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그냥 비장애인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예의’를 기준으로 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는 자세하게 그 일에 대해 물어봐주고, 공감해주고 위안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그런 사람에게는 ‘부모님 건강은 좀 괜찮으시니?’, ‘어디가 편찮으신거니?’ 정도 질문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됐니?’, ‘내 부모님이 그러시면 난 너무 힘들 거 같아’라는 식은 조금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던 거 같아요. 또 아예 그 일에 대해 언급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분들도 있을 거 같고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 어떻게 들리시나요?
박은선 작가에게 ‘장애인, 비장애인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물었다. 그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갖고 살아간다’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그 말을 너무 금기시하거나 부정적인 언사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는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비율이 80%가 넘는데도 비장애인일 때는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배제되어 있어 아직 구분선이 존재한다고 봐요.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사회가 유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시설이나 시스템이 더 잘 갖춰질 수 있을 거예요."
더 굳건한 작가가 되는 게 꿈
딸로서, 작가로서, 또 입시 미술 강사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은선 작가는 앞으로 좀 더 공적인 출간물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인스타툰은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이 없으면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작가’라고 할 수 있는 보다 굳건한 공적인 출간물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다. 출간물은 책도 될 수 있고,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박은선 작가는 여러 번의 어려움을 굳건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도 공유했다.
"항상 주변에도 하는 얘기인데, 저는 슬픔에 수몰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요. 원래 성격 자체가 생각은 많은데 딱히 부정적인 생각까지 깊이 하진 않아요.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해결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결국 일이 풀리고 그나마 잘 되게 하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과 근면함으로 ‘장애와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박은선 작가. 그의 이야기가 더 많은 장애인과 가족들에게 용기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