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부교수이자 인구와 인재연구원 원장인 김현철 교수는 ‘의사 출신 경제학자’라고 불린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가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코넬대 정책학 교수를,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 교수를 역임하고, 지난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김현철 교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연구해온 그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인생의 80%가 운, 주어진 것입니다
김현철 교수는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커리어를 쌓아왔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및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해외 유명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니 아무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소위 ‘능력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회적 성공의 길을 걸어온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인생의 8할은 운, 주어진 것입니다. 먼저, 태어난 나라가 평생 소득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나머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죠. 여기서 ‘운’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주어진 조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컨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그냥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이 운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김현철 교수는 자신의 저서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태어난 나라의 1인당 평균 소득과 불평등지수만으로 성인기 소득의 최소 50%를 예측”할 수 있고, “자녀는 부모에게 유전자를 물려받고 부모가 자녀의 어린 시절 환경도 상당 부분 제공”하기 때문에, 인생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태어나는 국가와 부모를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 김영사)
“선천적인 원인으로 근육병이나 자폐성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해 봐요. 이런 것들은 모두 그냥 주어진 것이잖아요. 그것이 나였을 수도 있고요.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조금 더 관대해질 수 있다고 믿어요. 가진 사람은 좀 더 겸손해지고, 내가 가진 것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세금을 납부하는 일에 대해서도 기뻐할 수 있을 거예요. 내게 주어진 조건이 남들보다 좋아서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는 거니까요.”
김현철 교수는 경제학으로 설명하지만,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철학적인 질문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주어진 조건, 즉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그가 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돌아보면 질문의 시작에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있었다.
“다들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하죠. 그런데 노력할 수 있는 힘조차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가요? 타고난 끈기, 타고난 집중력, 타고난 일머리처럼 노력하는 힘 역시도 주어진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노력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80%가 운이라면, 진짜 내가 만든 나는 별로 없다는 말인 거죠.”
사회적 약자의 불행을 보다
김현철 교수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병원에서 유방암 환자들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방암센터에 오는 환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지방에서 어렵게 서울의 병원에 찾아온 사람들이다. 당시 진료실에서 만난 한 명의 환자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신입 의사였던 제가 보아도 가슴이 괴사가 되고, 암세포가 겨드랑이까지 전이 된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어요. 명백한 말기 유방암임에도 환자 분께서는 부인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암이 이 정도로 전이될 때까지 왜 병원에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년 여성들은 자주 검진을 받아 초기에 치료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지, 경제 수준이 어떠한 지에 따라 같은 병에 걸려도 예후가 다르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낀 경험이었다. 이후 공중보건의사로 일하며 방문 진료를 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진료를 하는 일이었다. 그때 또 한 명의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여 안타까웠다.
“그분이 거동하지 못하시니 집 안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했어요. 그래서 진료 봉사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청소해드리려고 했죠. 이불을 빨려고 하려는데, 아들이 들어오더니 당신들이 뭔데 우리 집을 청소하냐고 따져 묻더라고요. 물론 맞는 말이죠. 그런데 그 순간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엄마를 방임하는 수준으로 내버려 둔 아들의 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김현철 교수는 이때 개인의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책을 고민할 때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답을 구했고, 경제학을 공부하라는 답이 대부분이었다. 전 세계의 빈곤 퇴치와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힘써온 김용 전)세계은행 총재를 만났을 때도 똑같은 답변을 들었다. 그렇게 김현철 교수는 경제학의 길에 접어들었다.
사람을 살리는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다
의학에서 경제학으로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라는 키워드다. 평소 김현철 교수의 모토 중 하나는 ‘I care’. 즉 “누가 되었든 간에 나는 너를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타고난 것이며 또한 교육된 것이었다.
“저희 부모님은 가치 지향적인 분들이에요. 그래서 제가 의대에 진학할 때도 ‘네가 의사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죠. 어렸을 때부터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을 향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의사가 되었을 때 만약 내가 실력 좋은 외과 의사가 된다면, 평생 몇 명의 삶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살리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분명하다. 천 명 이상의 환자들에게 ‘덕분에 삶을 구했습니다’라는 인사를 듣는다면 성공한 의사일 것이다. 하지만 김현철 교수는 더 많은 사람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다. 좋은 경제 정책은 수많은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쁜 경제 정책은 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빠뜨릴 수 있어요. 반면 좋은 경제 정책을 만들고 시행한다면 사람을 이롭게 할 수도 있죠.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경제학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현재 김현철 교수가 몸 담고 있는 ‘인구와 인재연구원’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인구와 인재연구원은 쉽게 말해 사람의 양과 질을 연구하는 곳으로, 저출산, 고령화, 이민, 교육, 건강, 노동, 사회복지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종합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수행한다. 특히 장애인, 북한이탈주민,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 연구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람’이라는 두 글자가 만나게 해준 의학과 경제학. 자리는 바뀌었어도 그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까?’를 고민해온 셈이다.
장애 아동과 그 가족의 아픔에 대해
김현철 교수가 관심 있게 살펴보는 주제 중 하나는 ‘함께 행복해지기 위한 사회의 조건’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피며 함께하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중에는 장애인의 삶도 있다. 과거에는 머리로 장애 문제를 생각했다면, 요즘은 가슴으로 장애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저희 아이들도 크고 작은 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그래서 머리로 생각하던 문제를 이제는 정말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제가 장애인 가족인 거죠. 저에게 장애라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어요.”
김현철 교수는 아이와 어린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때면 대기실에서 꼭 장애인 가족들과 대화를 한다. 의사로 일할 때는 환자의 삶만 생각했다면, 경제학을 공부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장애인 가족의 삶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환자를 보는 의사가 아니기에, 대기실에서의 그 시간이 그에게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좋은 정책을 만드는 비결
사회적 약자를 도우려면 제대로 된 정책이 바로 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장애인 혹은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들은 대부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현철 교수는 선의만 가지고는 좋은 정책을 만들지도, 사람을 살리지도 못한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정부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타겟팅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정책이 꼭 필요한 사람한테 가지 않고 불필요한 사람에게 간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국가 암 검진이라고 한다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 검진을 받아야 예방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병원에 잘 오지 않죠. 오히려 평소에 자기 건강을 신경 쓰고, 잘 관리하는 사람들이 검진을 잘 챙겨 받아요. 그러니까 국가 정책은 검진이 필요한데도 받지 않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해야 정확하게 도달할 거예요.”
김현철 교수는 제한적인 자원으로 정책을 운영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상자를 선별하고 정확히 지원하는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정책이더라도 제대로 효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의만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으며, 엄밀한 연구로 정확하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정책은 많지만, 현장에서는 크게 실감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정책 역시 의사가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과 처방 및 치료를 하듯이, 세심한 설계와 구체적 실행 방안이 뒤따라야 한다.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
인생의 80%는 운, 주어진 조건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관대해지라는 김현철 교수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준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궁금해진다. 만약 내가 좋은 운을 타고 나지 못했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 노력할 수 있는 힘조차 주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어진 조건은 말 그대로 주어진 것이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당신을 탓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이유가 과거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또는 다른 사람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며 자책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그리고 장애인, 노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나라의 의무이고, 복지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당연히 갖는 권리예요.”
김현철 교수는 자폐성장애의 예를 들어 설명을 이어갔다. 자폐성장애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하지만 부모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서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라고 해도 다르게 성장한다. 부유한 집은 장애 자녀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인한 장애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비슷한 사고를 경험했다고 해도 경제적 여건에 따라 대처도 다르고, 치료 결과 역시 달라진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불평등이 더 확대되고 커지는 나라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불평등이 줄어드는 나라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누구든 후자를 택할 거예요. 그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가 정책과 제도가 중요해요.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에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냉정하게 판단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죠. 그런데 국가 정책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일도 있어요. 그게 인식개선이에요. 그래서 저는 한국장애인재단이 장애인 인식개선에 더욱 앞장서 주기를 기대합니다.”
인식개선으로 시작할 변화
김현철 교수는 우리나라의 장애 관련 법과 제도가 나름 괜찮다고 말했다. 예컨대 장애인 고용 의무제와 같은 제도는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흡하다고 보았다. 특히 장애가 있는 학생을 위해 만든 특수학급에 대한 인식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한다.
“특수학급이 많이 만들어져서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특수학급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요. 장애가 있는 학생은 특수학급으로 보내 분리 교육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죠. 그러다 보니 특수학급 교사와 일반학급 교사도 각자의 역할만 할 뿐 서로 힘을 합치기 어려워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특수학급 교사와 일반학급 교사가 한 팀이 되어 장애 학생을 지도하고, 자폐성장애를 가진 아이를 학급의 반장으로 세우기도 하죠. 장애 학생도 어렸을 때부터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거예요. 저희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다면, 사회적으로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기대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의사가 되고, 경제학자가 되고, 이제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내는 김현철 교수. 그의 말처럼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저 주어진 것임을 안다면, 삶을 대하는 태도도,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을 향한 인식과 정책도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김현철 교수의 바람대로 우리 사회가 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살리고 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기획 : 김주현, 남궁소담
사진 : 홍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