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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2

[인터뷰 공간 짬] “수어를 배워 보세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예요.”

  • 손짓으로 말하는 배우&수어통역사 권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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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어통역사 권재은, 실베스트르(배우 박경주), 스카팽(배우 이중현), 수어통역사 최황순                  (사진 : 국립극단 제공) 

  


지난 4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스카팽>의 무대. 극중 하인 실베스트르 역을 연기하는 배우 옆에 한 사람이 더 있다. 똑같은 발걸음과 똑닮은 표정으로 실베스트르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손짓으로 말을 하는 이는, 바로 배우이자 수어통역사 권재은 씨다. 국립극단은 <스카팽>을 ‘배리어프리 공연(열린 객석)’으로 올리며 장애인·노인·어린이 등 모든 사람이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배우이자 수어통역사로 활동하며 접근성 연극을 만드는 데 함께한 권재은 씨를 만나 보았다.



배우이자, 수어통역사입니다

최근 공연예술계에서는 배리어프리 공연이 활발하다. 배리어프리(barrier free) 공연이란, 말 그대로 장벽(barrier)을 없애는(free)는 것으로, 그동안 공연예술로부터 소외되어왔던 장애인, 고령자, 어린이 등의 관람 약자가 마음 놓고 작품을 즐기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다. 관람 약자가 공연을 접할 때 마주하는 장벽을 발견하고 개선하여 무대에 올린다.


배리어프리 공연은 무대부터 특별하다. 보통의 공연에서는 ‘공연 중 퇴장하면 재입장이 불가’하지만, 배리어프리 공연 중 열린 객석 공연은 언제든 입·퇴장을 해도 괜찮다. 관객들이 원활히 입·퇴장할 수 있도록 객석 조명을 완전히 소등하지 않기도 한다. 특히 <스카팽> 공연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글자막과 그림자 수어통역을 선보였다. ‘그림자 수어통역’은 수어통역사가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에서 그림자처럼 동선을 함께하는 형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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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배우이자 수어통역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지난 4월에 열린 <스카팽> 공연에서는 하인 실베스트르 역할을 수어통역했고요, 지난 7월에 열린 <햄릿> 공연에서는 햄릿 역할을 전담하여 수어통역했습니다. 또 배우로도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답니다.”


연극 <스카팽>과 <햄릿>에서 시도된 수어통역의 경우, 목표는 같지만 방법은 조금 달랐다. <스카팽>에서는 수어통역사가 무대에 실제 등장하여 배우의 옆에서 밀착 통역을 했다면, <햄릿>에서는 무대의 고정된 위치에서 수어통역을 이어갔다. 작품의 성격이나 연출의 의도에 따라 배리어프리 공연은 저마다 다른 양상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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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어통역사 박미소, 옥따브(배우 이호철), 실베스트르(배우 박경주), 수어통역사 권재은                (사진 : 국립극단 제공)

                                                               
“<스카팽> 같은 경우에는 연출님께서 수어통역사가 무대 일부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역할에 맞는 의상도 입고 배우의 동선을 똑같이 따랐죠. 배우와 수어통역사가 하나처럼 보이기 위해 배우의 발걸음 하나까지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반면 <햄릿>의 경우에는 무대 가장자리의 고정된 위치에서 수어통역을 했고, 시적인 대사를 어떻게 수어로 통역할 수 있을까 연구를 많이 했어요.”

배우의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청각장애인 관객들에게 수어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미션이 주어진 셈이다. 권재은 씨는 수어통역사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내기 위해 연습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서 모니터하며 배우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면밀히 분석했다. 덕분에 배우와 수어통역사가 하나가 된 배리어프리 공연을 만들 수 있었다. 


두 개의 세계를 만나다
배우의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연히 공연을 보러 갔다가 연기에 대한 꿈이 싹텄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 내내 연기를 공부하고 대학에서도 연기를 전공했다. 이후 극단에 들어가 지금까지도 배우로서 탄탄한 프로필을 쌓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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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친구 따님이 꽤 유명한 배우분이라 그분의 공연을 보러 갔어요. 사실 작품은 좀 어려웠는데 집에 가는 길에 내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엄마한테 나도 연기 해보고 싶다고 장난 비슷하게 말씀드렸는데, 다음 날 제 손을 잡고 연기 학원에 데려가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연기를 시작해서 쭉 배우로 활동하게 되었어요. 실천력이 빠른 엄마 덕분이죠.”

졸업 후에도 배우로 활발히 활동하며 올해 상반기만 해도 <인피니트 에이크> <소담씨의 이별견문록>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배우 활동에 매진하느라 다른 곳에는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3년 전, 코로나 펜데믹으로 준비 중이던 공연이 취소되면서 자신의 길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배우이자 수어통역사로 활동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건너 건너 아는 지인분이 배우 겸 수어통역사로 활동하셨거든요. 그분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수어통역을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검색해보니 서울에서 수어통역을 배울 수 있는 교육원이 나오더군요. 그 길로 당장 학원에 등록했어요. 코로나 기간이라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더 컸지만, 바둑판 모양 화면 속에서 수어를 배우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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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수어통역의 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청각장애인과 크게 접점을 갖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그런데 수어에 입문하면서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권재은 씨가 흥미롭게 느꼈던 점은 ‘표현한다’는 점이었다. 같은 동작에도 표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예컨대, ‘귀엽다’와 ‘아깝다’의 수어는 똑같이 오른손을 들어 왼쪽 볼을 만지는 듯한 동작을 취하는 것이지만, 전달하는 이의 표정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또한 수어에는 ‘이’ ‘가’ ‘을’ ‘를’과 같은 조사가 없기 때문에 통역사의 역량에 따라 메시지 전달에도 차이가 생긴다.


“예를 들어 ‘나는 어제 결혼한 베트남 친구를 만났어’라는 문장을 통역한다고 가정을 해보면요. 어떻게 수어통역하느냐에 따라 ‘어제 결혼한’ 친구인지, ‘결혼한 친구를 어제’ 만났는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어요. 조사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 휴지(pause)를 두느냐로 의미를 전달하기도 해요. 정해진 규칙에 통역사의 해석이 더해지는 과정이죠.”



다르지만 닮은 두 가지 일

배우의 일과 수어통역사의 일은 다르지만 닮아있다. 먼저, 표정과 몸짓을 이용하여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공간을 활용하여 표현한다는 점도 유사하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하다. 권재은 씨는 ‘연기를 잘한다’에는 정답이 있지만, 수어통역은 경우의 수가 더 많아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잘한다, 못한다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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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우들의 연기를 접할 일은 참 많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나 드라마, 연극을 보면서 자라니까요. 그렇다 보니 연기를 배워 본 적 없는 사람도 어떤 사람의 연기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고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연기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정답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우의 일은 그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고요. 그런데 수어통역은 좀 달라요. 물론 정해진 단어와 문법은 있지만, 누구에게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방식이 달라질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친한 친구와 수어로 대화를 나눈다면 비슷한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 본 사람과 수어로 대화한다면 어떨까? 친밀도, 연령, 살아온 문화 등에 따라서 수어통역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권재은 씨는 수어통역사가 얼마나 직관적으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수가 알아들을 법한 표준의 수어를 하려고 해요. 보편적 대상을 기준으로 한다고 가정하는 거죠. 수어는 각자의 경험치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 기준을 스스로 세워가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재미있어요. 어떻게 연기할까를 고민하듯이, 어떻게 수어통역을 더 잘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과정이지요.”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수어통역의 세계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작품 <햄릿>을 수어통역할 때 특히 고민이 많았다. ‘햄릿’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명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수어로 통역할지 여러 갈래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 작품 특유의 시적인 느낌을 살릴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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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느냐 죽느냐’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아는 대사잖아요. 그것을 직역해서 수어통역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의미를 담은 말로 표현할 것인가를 수도 없이 고민했어요. 직역해서 표현하자니, 사느냐 죽느냐가 단순히 우리가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데 싶었죠. 작가의 대사가 잘 살지 않는 느낌이 들었어요.”

음성 언어에도 말소리나 말투의 차이에 따른 ‘말맛’이 있듯이, 수어통역을 하면서도 일종의 말맛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은유적인 표현, 고전 작품의 예스러운 단어들을 어떻게 현대의 관객들에게 통역할 것인가가 수어통역사로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권재은 씨는 연출가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수어통역사로서 말맛을 연구했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고통을 견딜 것이냐’하는 대사가 있었는데요. 이 대사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고민했어요. 너무 많은 걸 수어로 설명하면 관객들의 해석할 권리를 뺏는 것 같고,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만 직역하면 셰익스피어의 은유가 제대로 살지 않는 것 같았죠. 수어는 굉장히 직접적이고 한눈에 보이는 표현인데, 이 수어로 셰익스피어의 은유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더 많은 배리어프리 공연을 꿈꾸며
권재은 씨는 최근 배리어프리 공연이 확실히 많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특히 국공립 공연장이나 국공립극단에서 하는 공연들은 배리어프리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배리어프리 지원 사업도 늘어나 각 극단에서도 접근성 공연을 시도하는 사례가 큰 폭으로 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갈증이 있다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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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공연을 할 때, 농인 친구들이 보러오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수어통역이 없으면 굉장히 미안하더라고요. 물론 저 역시도 극단의 단원으로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죠. 예산의 문제도 있고, 지방 공연의 경우 수어통역사들과 지역마다 동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배리어프리 공연이 더 많이 시도되면 좋겠어요.”

분명한 건 배리어프리 공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여러 방법으로 제작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장애를 소재로 한 연극도 활발히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변화와 발전을 기대해 볼 만하다. 권재은 씨는 더 많은 이들이 공연장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배리어프리 공연이 더 활발히 제작되기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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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 공연을 보면, 그 뒤로도 계속 공연장을 찾게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 번도 공연을 못 본 사람들이 많잖아요. 더 많은 분이 공연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으면 해요. 저는 예술이 주는 힘을 믿는 사람이거든요. 장애인, 비장애인 관계없이 누구나 예술에 대한 경험을 똑같이 누려야 해요. 배리어프리 공연이 늘어난다면 공연예술을 즐기는 장애인 관객들도 증가할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예술을 통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장애인 관객들도 원하는 공연을 골라서 볼 수 있으려면, 배리어프리 공연의 절대적인 양이 늘어나야 할 것이다. 배리어프리 공연을 한 편 보고 그 매력에 빠졌는데, 다음에 볼 수 있는 작품이 없다면 공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어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더 완성도 높은 배리어프리 공연을 위해 권재은 씨는 청각장애인 관객들의 피드백을 주의 깊게 살폈다. 관객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단어를 쓰는 것이 더 좋다던가, 배리어프리 공연을 할 때 이런 점을 더 신경 써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주기도 한다. 관객들의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피드백이 배리어프리 공연의 품질을 끌어올릴 것이라 믿는다. 


수어를 배우고 새롭게 열린 세계
권재은 씨는 끝으로 모두가 수어를 배워 보기를 권했다. 외국어를 배우듯이 수어를 또 하나의 언어로 배우면 삶이 달라질 거라며 말이다. 실제로 그의 추천으로 수어통역을 배우고 시험을 준비 중인 지인들이 제법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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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운 후 그 지역에서 간단한 회화를 하게 된다면 굉장히 기쁘잖아요. 수어를 배우는 중에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핸드스피크’라는 유명한 농인 연극단체가 하는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농인 배우의 수어를 보는데 무슨 대사이고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읽히는 거예요. 그때 공연이 참 재미있고 수어로 소통했다는 희열이 느껴졌어요. 만약 제가 수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농인 배우의 대사를 알지 못했을 텐데, 수어를 배우니 보이고 느끼는 세상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권재은 씨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 첫 번째 경험이 연기였고, 두 번째 경험이 수어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수어를 배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기를 권했다. 수어로 간단한 인사말을 해보는 것을 시작으로, 취미 삼아 배우다 보면 청각장애인과도 소통할 수 있고, 외국어를 배우듯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수어로 소통했을 때의 짜릿함과 희열을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봐야 할 감정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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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문화 속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 가치관 등을 배우는 것이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첫걸음이 된다. 수어를 배운다는 것은 청각장애인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내가 알고 이해하는 세계가 한 뼘쯤 더 넓어진다는 의미다. 다가오는 9월 23일, 세계 수어의 날을 기념하며 우리 모두 아름다운 언어, 수어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기획 : 김주현, 남궁소담
 사진 : 홍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