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 현진, 찬연)
아이돌 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춤과 노래 실력은 물론 타이트한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체력은 필수다. 힘든 내색을 잘 비치지 않는 정신도 타고나야 한다고들 한다. 또한 글로벌 팬들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 능력도 갖춰야 한다. 재능은 물론 어마어마한 노력까지 더해져야 가질 수 있는 직업인 셈이다. 멤버 3인(찬연・현진・지석)이 모두 청각장애인인 그룹 ‘빅오션’도 그런 자질을 갖춘 아이돌이다. 최근 신곡 ‘Blow’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빅오션을 한국장애인재단이 만났다.
무대 위에서 팬들을 만난 지 석달
지난 4월 데뷔한 그룹 '빅오션'은 특별한 정체성을 노래와 안무에 녹였다. 이들의 노래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미국 수어, 국제 수화로도 번역돼 전 세계 팬들에게 가 닿는다. 수어를 모티브로 한 독특한 안무로도 활동하고 있다. 전설적인 아이돌 그룹 HOT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데뷔곡 '빛(Glow)'은 물론 지난 6월 발표한 싱글 2집 'BLOW' 에도 직관적이면서 시원시원한 수어 동작이 포함돼 있다. 수어를 안무에 사용한 효과는 단순히 장애인 팬들이 노래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을 넘어선다. 빅오션의 매력을 배로 만드는 것은 물론 팬층도 넓히는 전략으로 작용한 것이다.
(현진)
(현진)
"Blow에서 'The sun goes down(해가 지고) / The stress runs out(스트레스가 사라지고) / We hit the floor(우리는 바닥을 치고) / Our hearts go up in flames (우리의 심장은 불타오른다) 라는 가사가 나오는 부분에 안무가 수어로 되어 있어요. 신곡 ‘BLOW’가 대부분 영어 가사로 이뤄져 있어 영어 수어로 안무를 짰죠. 데뷔곡 ‘빛(Glow)’은 한국어 가사가 많아 안무에 한국 수어를 넣었는데 그게 다른 점이에요. 수어도 하나의 언어기 때문에 수어 안무를 넣음으로써 더 많은 분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 수어가 친근하지 않은 분들은 저희 곡을 통해 자연스럽게 수어를 접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팬층도 두터워진 것 같아요."
(지석)
"수어를 안무에 사용하다 보니 매번 곡을 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아요. 저희의 매력을 잘 살려 주는 것은 물론 수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도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데뷔한 지 갓 석달이 지난 이들의 일상은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연습으로만 채워져 있던 일상에 각종 촬영과 무대, 챌린지 등의 일정이 들어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데뷔 전에는 SNS로만 소통하던 팬들을 직접 무대에서 마주하는 꿈같은 경험을 했다. 매체로만 접하던 아이돌 선배들과 안무 챌린지를 찍으며 신기함도 느꼈다. ‘공인’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평소 행동도 더 조심스러워졌다고 한다.
(지석)
"저희의 데뷔곡이 HOT 선배님들의 ‘빛’을 리메이크 한 버전이잖아요. 그래서 데뷔 이후에 토니안 선배님을 뵈러 갔어요. 그때 선배님께서 ‘이렇게 (아이돌 데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 내줘서 고맙고, 멋있는 빅오션의 여운이 길게 남게끔 오래 활동해달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찬연)
(찬연)
"저희는 아직 갈 길이 먼 신인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이 저희를 알아봐 주시고 반겨주세요. 아직은 어색하지만,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거나 사인을 해달라는 분이 계시면 쑥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죠."
(현진)
"저희가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에 데뷔를 했어요. 그 전부터도 저희가 방송을 진행하면서 팬분들을 만나고 있었는데요. 데뷔 날 팬들께서 저희를 위한 데뷔 축하 영상을 보내줬어요. 미국, 스페인 등 다양한 국적의 팬들이었죠. 팬들이 한국 수어로 응원을 보내 주시고, 미국 수어로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음악중심, 인기가요, 더쇼 같은 음악 프로그램 무대를 오를 때마다 파도(빅오션의 공식 팬덤명)분들이 찾아와 주시는데 그때마다 큰 감동을 받아요."
더 넓은 세상을 듣는 우리
음악은 들어야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예술이다. 비장애인에 비해 청각 정보를 접하는 것이 제한적인 빅오션 멤버들이 아이돌이라는 직업과 어떻게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다른 감각이 훨씬 더 예민하게 음악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컬 멤버인 현진은 근육에 힘을 주는 정도를 기억해 음정을 맞춘다.
(현진)
(현진)
"(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니) 어디까지 소리를 내어야 특정 음에 도달하는지 알아내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죠. 음역대를 표시해주는 앱이에요. 지금 내가 내는 목소리가 어디에 도달했다는 걸 보여주는 앱인데요. 맞는 음정에 도달했을 때 내가 근육에 어느 정도 힘을 줬는지 기억해놓고 있다가 그 감을 계속 가져가려고 노력해요. 정확한 소리를 내는 데는 조금 익숙해졌는데, 앞으로는 좀 더 발성 훈련을 더 해야 할 거 같다고 느껴요. 좀 더 풍부한 소리를 내기 위해서예요. 발음도 좀 더 선명하게 들릴 수 있도록 연습하고요."
지석은 아이돌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춤에 재능이 뛰어나다.
(지석)
"춤을 배울 때 습득력이 빠른 편이에요. 동작을 빠르게 익히고 그다음엔 ‘여기서 뭘 더 채우지?’를 고민하곤 하죠. ‘어떤 느낌을 살리면 좋을지’ 같은 그런 부분을요. 춤을 출 때 즐기면서 추지만, 평가는 스스로 냉정하게 하는 것 같아요. 아이돌 선배님들 춤 중에서는 스트레이키즈 현진 선배님의 춤 스타일을 닮고 싶어요. 저희 멤버 ‘현진’ 형도 멋있지만(웃음), 스트레이키즈 현진 선배님은 춤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거든요. 부드럽게 하고 싶을 때는 부드럽게, 힘주고 싶을 때는 힘을 줘서요. 저도 그렇게 저만의 자유로운 스타일로 춤을 추고 싶어요."
이들이 세상의 눈높이에 맞는 아티스트가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원래 아이돌 연습생이 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 빅오션 역시 연습생이 된 과정부터 난이도가 높았으며, 그 기회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지석)
지석은 연습생이 되기 전 알파인 스키 선수였다. 선수 생활을 즐겁게 했지만 평소부터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컸다. 청각장애인 학교에 다니면서 춤 수업을 따로 들으며 연습을 미리 해놨을 정도였다. 연예인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찰나 현재 소속사인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가 개최하는 배리어프리 행사 ‘런웨이’를 알게 됐다. 장애인 예술가들과 비장애인 예술가들이 만나 펼치는 패션쇼 컨셉의 창작 무용공연이었다. 처음에는 공연을 보러 갔다가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 연습 후 도전한 끝에 실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무대에서 지석은 소속사 관계자의 눈을 사로잡았고 연습생까지 될 수 있었다.
현진은 다른 멤버들에 비해 입사가 2~3년 정도 일렀다. 연습생이 된 데는 그가 그전까지 쌓아 온 업계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현진)
"입사 전에 저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했어요. 청각장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깨는 상황극 영상을 올렸죠. 그 채널을 계기로 EBS 프로그램에 1년 반 정도 고정패널로 출연하기도 했어요. 소속사에서 저를 보시곤 ‘아이돌을 준비하고 있는데 관심이 있는지’ 물어오셨고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어요."
찬연은 데뷔 전 대학병원에서 청능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일하던 병원이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 트로이 코처를 홍보대사로 위촉하며 위촉식이 열렸고, 찬연은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갔다. 그때 농인 배우 김리후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현재 소속사에 대해 알게 됐고, 면접을 통해 연습생이 될 수 있었다. 오디션에서는 걸그룹 ITZY의 ‘달라달라’와 ‘스니커즈’ 커버 댄스를 춰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청능사란?
청각 기능의 평가와 재활을 담당하는 전문가
(찬연)
"병원에서 근무할 때 배우 트로이 코처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자신만의 특별함을 가지고 엔터 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았죠. 이후 빅오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팬들 덕분에 저희가 더 위로 받아요
긴 과정을 거쳐 이제 막 아이돌로서의 첫발을 뗀 빅오션. 지난 3개월간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그간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는 ‘여전히 더 발전해야 할 것 같은 부분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지석은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활력 넘치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 스케줄 상 연달아 이어져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무대에서도 충분히 순발력을 발휘해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싶다고 말이다.
(지석)
"무대에서 더 많은 힘을 내기 위해서는 운동을 많이 하고 체력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멤버들과의 텐션을 맞추며 에너지를 키우는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현진은 무대에서 능숙하게 카메라를 찾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라 이 부분을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첫 공연이었던 ‘더쇼’ 무대에서 유독 긴장을 많이 한 탓에 카메라를 놓친 순간이 있었는데 그게 못내 아쉽기 때문이다. 현재 빅오션은 신곡 연습은 물론 기본기를 위한 개인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는 만큼 곧 발표될 신곡 무대에서는 더 발전된 멤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데뷔전부터 SNS를 통해 만나온 팬들과 지난 3개월간 더욱 깊은 유대감이 형성됐다고도 멤버들은 말했다.
(지석, 현진, 찬연)
(찬연)
"저희 SNS 라이브 방송에 찾아오시는 팬 중 저희 덕분에 가끔 우울감을 극복했다는 분이 계세요. 데뷔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사실 팬들 덕분에 위로받는 건 저희인데, 팬분들은 저희에게 위로를 받는다고 하시니까 서로 돈독해질 수밖에 없어요."
(지석)
"팬들의 말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지만 특히 ‘빅오션이라는 그룹이 세상에 나와줘서 고맙다’,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 내줘서 고맙다’ 그런 말이 제일 와닿아요. ‘용기내서 나왔다’는 말이 저희를 위로해 주는 거 같고 마음을 조금 더 알아주시는 거 같아서 더 감동적이에요."
‘장애’라는 정체성보다 재능과 노력으로 인정받길
빅오션의 꿈은 재능으로 인정받는 아이돌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이라서가 아닌 여느 아이돌처럼 재능과 노력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 세 멤버들의 소망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펼쳐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현진)
"팬들이 저희를 봤을 때 처음엔 그냥 매력 있는 아이돌인 줄 알았는데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저희를 멋있다고 느끼고 응원하게 되었으면 해요.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펼쳐 나가고 싶어요."
(지석)
"처음에는 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나아가선 그 궁금증이 기대감으로 바뀌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어요. 반전 매력이 있는 가수가 되는 거죠. 한결같지만 늘 성장하는 모습으로 팬들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빅오션의 인터뷰 내내 느껴진 건 이들의 ‘진심 어린 시선’이었다. 청력을 보완하기 위해 상대방의 입 모양과 표정에 집중하는 것이 습관이 된 멤버들의 시선은 같은 멤버가 인터뷰에 답을 할 때도 소속사 관계자가 말을 할 때도 이어졌다. 대화는 물론 무대의 완성도, 가수로서의 꿈, 그들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에도 ‘진심’인 빅오션. 그들의 잠재력이 바다같이 무한히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