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특별한 무대가 시청자들을 만났다. JTBC 특집 프로그램 ‘리얼라이브’에서 디지털트윈 기술로 실존 인물을 가상 공간에 구현해낸 것이다. 무대의 주인공은 2인조 록밴드 ‘더 크로스(The Cross)’. 12년 전, 사고로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던 김혁건 가수는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빼닮은 디지털트윈과 함께 무대 위에서 노래했으며, 현장의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로 호응했다.
3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고음의 주인공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락 발라드 장르가 큰 인기를 끌었다. 락 발라드는 대중음악에서 락의 요소가 가미된 발라드 노래를 말하는데, 2003년 1집 앨범 ‘Melody Quus’로 데뷔한 더 크로스 역시 락 발라드 곡을 부르는 그룹 중 하나였다. 특히 김혁건 가수의 3옥타브를 넘나드는 시원스런 가창력은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후 그들의 대표곡이 된 ‘Don't Cry’는 소위 노래방에서 남성들이 많이 도전하는 곡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데뷔한 해에 심야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선 더 크로스의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MC의 끝인사와 함께 관객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고 한다. 따로 인터뷰도 진행하지 않는 그저 마지막 무대. 그러나 그들의 노래를 들은 관객들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좋은 음악이 관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데 성공한 셈이다. ‘처음에는 나가려고 일어섰지만, 두 번째는 박수를 치기 위해 일어섰다’는 전설의 무대이다. 당사자인 김혁건 가수는 이 무대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열심히 했던 기억은 나요. 신인이었고 아무도 저희를 모르던 시절이니까요.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잖아요. 어떻게든 조금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열심히 불렀던 것 같아요. 그 마음이 관객들에게 전해졌던 모양이네요.”
신인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한 가창력, 호소력 짙은 곡으로 더 크로스는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후 멤버 간에 음악적 지향점이 달라 갈등도 겪었다. 대중성 있는 곡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창작곡을 부르기 위해 팀을 탈퇴했던 김혁건 가수가 다시 멤버 이시하 씨와 의기투합하여 신곡 발표를 계획하고 준비 중이던 어느 날, 뜻밖의 사고가 두 사람의 새 앨범 계획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그 이후
2012년 3월, 김혁건 가수가 타고 가던 오토바이는 반대편 차선의 자동차와 정면충돌하여 큰 사고가 났다. 당시 부모님께 “20분 내로 안 오시면 아드님의 얼굴을 못 보실 수 있다”는 연락이 갔을 정도로 위중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사고로 인해 어깨 아래로는 감각이 없고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판정을 받게 되었고, 그 후 2년 넘게 병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날의 사고는 많은 것을 바꾸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노래 부르는 일마저 어렵게 되었다. 폐활량이 비장애인의 4분에 1정도였고, 소리를 내는 데 필요한 횡격막에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노래를 부르는 일뿐만 아니라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음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원하게 뻗어 올라가는 고음을 내던 가수였기에,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가족과 동료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꿈을 이어갈 수 있도록 계속 도왔다. 더 크로스의 또 다른 멤버인 이시하 가수를 비롯하여, 음악계의 동료들이 그의 음악 활동을 격려했다. 이따금 전화하여 안부를 묻고 음악 활동을 응원해주는 선배들도 있었다. 덕분에 김혁건 가수는 마냥 멈춰있을 수만 없었고, 병원 주차장에서 애국가를 연습했다. 처음에는 애국가 1절을 끝까지 부르기 어려운 정도였지만, 차츰 방법을 찾아갔다.
부모님의 사랑이 만든 기적
특히 그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음악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배를 누르면 복식호흡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아들의 배를 누르는 장치를 만들고자 철공소를 두 발로 뛰었다. 발품을 팔며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중, 이들의 사연을 들은 한 철공소의 도움으로 노 젓듯이 배를 눌러주는 ‘수동 복압 장치’를 개발하게 되었다.
“기계공학을 전혀 모르는 부모님이 저를 위해 수동 복압 장치를 연구하셨어요. 구로공단에 직접 가서 배터리며 조이스틱 같은 걸 구매해서 만들어 보기도 하시고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요. 어느 순간에는 이제 도저히 우리 능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한계도 느꼈어요. 그런데 이 기계가 모태가 되어 이후, 서울대학교 로봇융합연구소에서 지금의 자동 복압 장치를 개발해 주셨어요. 현재 노래할 때 사용하는 장치도 개발을 거듭하며 진화해왔죠.”
그의 설명에 따르면, 1세대 복압 장치는 부모님이 개발한 수동 장치에 모터와 조이스틱을 다는 형식이었다. 이후 2세대는 사용하기 편하도록 보다 더 가볍고 장착하기 쉽게 바뀌었으며, 3세대는 녹음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소음을 줄였다. 4세대는 갈비뼈 부상 등을 방지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고, 현재는 5세대 자동 복압 장치를 사용 중이다. 앞으로는 노래 중 경련이나 경직이 일어나는 경우를 대비할 수 있도록 개발할 계획이다.
어려움을 견디며 노래해
자동 복압 장치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관심을 가지고 연락을 해오는 이들도 몇몇 있었다. 장애가 있는 이들 중,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기기를 쓰고 싶다는 이도 있었고, 가래 배출을 원활히 하는 데 도움이 되게 배를 누르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자동 장치는 연습 없이 사용했을 때 다칠 위험도 있기에 수동 장치를 보내드리기도 했지만, 기기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잘 적응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사용하기에 무겁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기기를 활용해도 목소리가 커지거나 호흡을 편하게 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가수나 성악가와 같이 호흡과 소리를 다루는 기술이 있으면 방법을 익히기에 조금 수월하겠지만, 복식호흡의 원리와 발성을 잘 모르는 분이라면 기기가 있어도 크게 도움을 받지 못하셨어요. 정말로 필요성이 간절해야 할 수 있는 일이죠.”
사실 복압 장치가 있다고 해도,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 전성기 때처럼 소리를 내는 일은 쉽지 않아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기기에 적응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배를 누르면서 노래 부르는 방식이다 보니, 출혈이나 염증이 나타나고 혈압이 오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배에 멍이 들 정도로 연습을 했다.
2020년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3’에 출연했던 당시, 현장에서 ‘Don't Cry’를 열창하다가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어깨 아래로 감각을 느낄 수 없다 보니 현장에서는 부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녹화 이후 힘이 없어 병원에 가보니 이미 골절상을 입은 상태였다. 부상을 무릅쓰고 노래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제가 다친 지 이제 12년 차 되는데요. 30대 때는 체력적으로 괜찮다고 느꼈지만, 40대가 된 지금은 좀 달라요. 옛날보다는 힘이 드는 게 사실이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노래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이 제 무대를 좋아하고, 또 팬들이 사랑해주시니까 힘들지만 어떻게든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더 많이 찾고 싶어요. 그 방법 중 하나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는 거였죠.”
디지털트윈으로 새로운 무대에서 서다
특별한 무대의 싹이 움튼 것은 3년 전이다. 故 김광석 가수의 목소리를 AI로 학습해 최신곡을 부르도록 연출한 것을 본 김혁건 가수는 이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공지능 기술로 故 임윤택 가수의 모습을 복원한 울랄라세션 완전체 무대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에 AI 기술을 활용하여 목소리를 구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관련 업체에 의뢰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미 복식호흡조절 장치를 사용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한계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혁건 가수의 디지털트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디지털트윈이란 현실 세계의 기계나 장비, 사물 등을 컴퓨터 속 가상세계에 구현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실존 인물인 김혁건 가수를 가상 공간에 구현해낸 것이다.
디지털트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만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김혁건 가수의 영상과 사진을 전부 취합해서 AI로 만들었고, 체형이 비슷한 연기자를 섭외하여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연출했다. 특히 목소리를 구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20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목소리를 모두 학습시켜 AI가 살려냈는데, 목소리가 비슷하게 들리지 않아 수정 및 폐기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다. 전성기 시절 3옥타브 고음 샤우팅 창법으로 유명했던 김혁건 가수이기에 목소리 구현은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기획 : 김주현, 남궁소담
사진 : 홍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