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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4

[어쩌다 장애인] 함께 달리며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사이

  • 끈으로 이어진 인연, 김영아 가이드 러너와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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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아 가이드 러너,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


‘인연’을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는 ‘끈’이다. 엄마와 자녀가 탯줄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특별한 끈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끈은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자, 서로를 믿고 함께 달리는 동반자가 되어주는 신뢰의 상징이기도 하다. 김영아 가이드 러너와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는 벌써 8년째 함께 달린 사이다.



달리기의 매력에 빠지다

김영아 가이드 러너는 이민규 러너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50대 이상이 주를 이루던 시각장애인 러너들 사이에서 젊은 선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김영아 가이드 러너)

“원래는 50대, 60대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민규 씨가 온 뒤부터는 젊은 친구들도 많이 합류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체력이 좋으니 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다 보니 당근과 채찍을 함께 주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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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


(이민규 러너)

“맞아요. 감독님이 조언을 많이 하시거든요. 그래도 운동을 더 잘하라고 얘기해주시는 거니까 기분이 좋아요. 마음을 알기 때문에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고 있어요.”


평범한 은행원이던 김영아 가이드 러너는 2003년 전국 금융인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달리기에 푹 빠졌다. 달리기의 매력은 출발선이 같다는 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작과 끝이 인생과 닮았다. 그녀는 달리면서 삶과 사람을 배웠다고 말한다.


(김영아 가이드 러너)

“달리기는 출발선도, 골인점도 같아요. 그래서 감동을 누구나 스스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마라톤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개개인의 목표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태어나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 안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우리는 함께 달리는 쪽을 택한 것이에요.”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7310_4292.JPG (사진 제공 : 김영아 가이드 러너) 


이민규 러너가 달리기 매력에 빠진 것 역시 ‘수많은 사람과 같이 뛴다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이민규 러너)

“2016년에 지인의 권유로 그리스에서 열리는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달리기가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리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참가 신청서를 보낸 거였죠. 그런데 완주하고 나니 뜻밖의 감동이 몰려왔어요.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달린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붐비는 소리, 뛰는 소리, 팡파르 소리가 어우러져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답니다.”



가이드 러너는 ‘함께 달리는 사람’

2007년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 여자 1위를 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김영아 씨는 당시 시각장애인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본격적으로 가이드 러너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시각장애인의 가이드 러너로 활동한 적이 있었지만, 그날의 경험은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7060_3413.png (김영아 가이드 러너) 


(김영아 가이드 러너)

“반환점에서 시각장애인 선수들의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내 다리를 나를 위해서만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그전에도 가이드 러너 활동을 하면서 10킬로미터, 혹은 하프마라톤을 함께 달린 경험이 있었는데요. 풀코스를 달리던 시각장애인 선수들의 표정이 저에게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를 느끼게 해줬어요.”


김영아 가이드 러너는 20년 가까이 가이드 러너로 활동하며 수많은 시각장애인을 만났다. 그녀에게 시각장애인 러너는 ‘함께 달리는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느낌으로 즐겁게 러닝에 나섰을 뿐이었다. 그런데 함께 달리던 러너가 돌아가고 나니 친구라는 단어에 무게감이 생겼다고 한다. 동반 주자로서 조금 더 책임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함께 달리는 사람’으로서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는 서로 깊이 신뢰하고 소통하며, 인생을 함께하는 소중한 인연인 게 분명하다.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를 이어주는 ‘끈’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는 어떤 방법으로 함께 달릴까? 일단 가이드 러너는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끈’을 사용하여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역할을 한다. 달리기 전에 가이드 러너는 시각장애인 러너에게 어느 쪽에서 달리는 것이 좋은지 물어본 후, 원하는 위치에 따라 가이드를 한다. 필요에 따라 끈을 짧게 잡아 혼잡한 구간을 통과한다거나 길에서 벗어나면 줄을 당기는 등 끈을 통해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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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21)


(김영아 가이드 러너)

“누구나 눈을 감으면 끈이 있는 쪽으로 몸이 가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가이드 러너는 시각장애인 러너의 어깨 뒤에서, 반걸음 뒤에서 달려요. 내가 앞으로 가거나 옆으로 가면 시각장애인 러너와 스텝이 꼬이고 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가이드 러너로 처음 오시는 분들 중에서 자신이 앞에서 시각장애인을 이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반보 뒤에서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고 지키는 것이 가이드 러너의 역할이에요.”


가이드 러너는 앞에 과속방지턱이 있다면 시각장애인 러너가 넘어지지 않도록 ‘앞에 턱’과 같은 짧은 말로 장애물을 피할 수 있도록 알려준다. 또한 차량 진입 방지 보호대가 있는 구간을 통과할 때는 ‘여기서부터 천천히’라는 말로 안내하고, 시각장애인 러너와 함께 위험 구간을 안전하게 지나간다. 이처럼 달리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상황을 안내할 뿐만 아니라 끈을 통해 속도와 방향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시각장애인과 가이드 러너를 연결해주는 끈은 무엇보다도 안전을 지키는 소중한 도구이다. 하지만 이민규 러너에게 끈은 달리기 기록을 위한 도구나, 안전을 위한 도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7073_6685.png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


(이민규 러너)

“저에게 끈은 좀 더 의지가 생기게 해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저 혼자 뛰는 게 아니라 누군가 저를 위해 시간을 내주고 함께 달려주고 있다는 의미를 담은 물건이니까요. 함께 달리려고 시간을 내준 가이드 러너를 위해서라도 힘들지만 참고 더 달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눈이 잘 보여서 혼자서 뛸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달릴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에요. 마라톤을 하면서 체력적 한계에 부딪힐 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건 가이드 러너와 함께 달렸기 때문일 거예요.”


이민규 러너는 같은 끈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기록을 내야 하는 대회에서는 끈이 무겁게 느껴지고, 가볍게 달릴 때는 끈도 더 가볍게 느껴진다. 한편 김영아 가이드 러너에게 끈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자 ‘함께’의 의미를 보여주는 소중한 도구이다.


(김영아 가이드 러너)

“가이드 러너와 시각장애인 러너는 끈으로 만나는 거잖아요. 서로가 그 끈을 잡으면서 같이 달리는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에 대한 존중과 감사의 의미가 담긴 거죠.”



가이드 러너가 지켜야 할 에티켓

두 사람은 매주 토요일 남산에 모여 함께 달린다. 매주 가이드 러너를 위한 교육을 진행하는 것도 김영아 가이드 러너의 일. 시각장애인 러너가 당황하지 않도록 가이드 러너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점을 설명하고 기본적인 에티켓을 알려준다. 특히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 주의해야 할 것들을 일러주는 과정은 필수이다.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5971_6737.jpg(사진 제공 : 김영아 가이드 러너)


(김영아 가이드 러너)

“시각장애인 러너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에 불편한 점이 있어도 가이드 러너에게 제대로 얘기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도움받는데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싶은 마음인 거죠. 하지만 가이드 러너에게는 함께 뛰는 시각장애인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뛸 때도 항상 시각장애인이 땅의 정 가운데 서 있도록 하라고 말씀드려요.”


이민규 러너는 대부분의 가이드 러너가 기본에 충실하고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달리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드러날 때도 있다고 얘기한다. 특히 최근 러닝 붐이 일어나면서 자신이 달리는 모습을 SNS에 기록하려고 하다 보니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7084_6042.png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


(이민규 러너)

“요즘 워낙 SNS를 많이 하다 보니 가이드 러너 활동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출발 전에 혹은 완주를 하고 난 뒤에 사진 찍는 것을 권해드려요. 달리는 도중에 사진을 찍으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대회에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인파가 많은 쪽으로 시각장애인 러너를 이끌고 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인파 속에서 시각장애인은 더 많은 소리 자극에 노출되고, 혼잡 구역을 지나 안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그래서 김영아 가이드 러너는 때로 악역을 자처할 정도로 에티켓을 꼼꼼하게 지키도록 강조하는 편이다.



가족만큼 끈끈한 사이

김영아 가이드 러너와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는 함께 달리는 친구이자, 서로를 신뢰하는 동반 주자다. 이제는 서로의 가족도 알고 지내는 ‘또 하나의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얘기한다.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5999_7423.JPG(사진 제공 : 김영아 가이드 러너)


(김영아 가이드 러너)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같이 달려서인지 달리기를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가이드 러너로 함께 달리곤 해요. 아이가 가족 말고 그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민규 씨예요. 민규 삼촌은 자기 마음을 다 아는 것 같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달리기하러 오면 엄마는 안 챙기고 민규 삼촌이랑만 다녀요.”


(이민규 러너)

“같이 달리다 보면 제 등에 손을 대고 응원해주곤 하는데요. 막바지 코스에서는 누구나 힘들잖아요. 그때 응원받으면 정말 고마워요. 의지하면 안 되지만, 조카의 응원에 저도 모르게 의지할 때가 있어요.”


혼자서는 꿈꾸지 못할 일도 함께하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김영아 가이드 러너는 이민규 러너가 올해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좋은 기록을 내기를 응원했다. 이민규 씨는 높이뛰기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경험이 있는데, 달리기 부문에서도 결과를 만들어내기를 바라고 북돋우는 것이었다.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7094_6372.png (김영아 가이드 러너)


(김영아 가이드 러너)

“민규 씨가 잘 달리지만 기록을 못 낼 때가 있어서 아쉬워요. 항상 남을 배려하다 보니 자기에게 잘 맞는 가이드 러너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때가 많아서요. 워낙 선수들이 많아서 메달 따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민규 씨가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으면 좋겠어요. 그럴만한 충분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아니까요.”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가이드 러너와 시각장애인 러너는 서로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문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가이드 러너가 달리면서 보이는 풍경을 말로 설명해 주면, 시각장애인 러너는 마음으로 아름다움을 그려볼 수 있다.


(이민규 러너)

“김영아 가이드 러너처럼 베테랑 가이드 러너는 경치를 잘 설명해 주세요. 예를 들어 봄의 풍경이 어떤지, 이곳의 지형은 어떤지, 가이드 러너가 얘기해주면 시각장애인은 귀로 들으면서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 뛰었는지를 기억하게 되거든요. 달리면서 평상시에 모르고 지나쳤던 봄의 정취를 느끼는 거죠.”


비시각장애인이라면 풍경을 눈으로 보거나 카메라에 담겠지만, 시각장애인은 다르다. 귀로 듣고 온몸으로 봄을 체감한다. 이때 가이드 러너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달리기의 즐거움이 더욱 커진다. 이민규 러너는 풍경을 그려보는 것이 달리기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얘기한다. 김영아 가이드 러너 역시 설명하기 위해 더 자세히 보기 때문에 봄의 풍경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한다.


2a915b9d21b943ea06a82de3649670a1_1747187103_3598.png (김영아 가이드 러너, 이민규 시각장애인 러너) 


(김영아 가이드 러너)

“시각장애인 러너와 함께 달릴 때는 같이 가서 꽃을 직접 만져본다든가 풍경을 설명해 드리곤 하는데요. 그렇게 하면서 저도 한 번 더 배우게 돼요. 늘 눈으로만 보던 꽃이나 나무를 직접 만져보다 보면 몰랐던 것들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또 같이 뛰는 러너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 꽃을 더 세심히 관찰하기도 해요. 덕분에 저 또한 세상을 새롭게 만나는 셈이죠.”


그래서 김영아 가이드 러너에게 달리기는 ‘세상을 만나러 가는 것’과 같다. 시각장애인과 같이 달리면서 꽃의 향기를 맡고 새로운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다. 어떤 꽃이 가장 좋았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봄의 풍경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알려주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같이 봄을 느끼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는 함께 달리며 특별한 행복을 느낀다.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는 오늘도 함께 달린다. 계절이 변화하고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것이 바뀌어 가도 ‘달리기’만큼은 여전히 정직하게 그 자리에 남아 있다. 함께 달리며 인생을 배우고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는 사이, 서로가 있기에 더욱 행복한 시각장애인과 가이드 러너의 이야기다.



기획 : 김주현, 남궁소담

사진 : 홍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