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시간은 가장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시간이에요. TV나 유튜브처럼 잠시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죠.”
책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박정민 배우는 독서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년에 수백 권을 읽는 다독가는 아니지만 그는 책을 통한 모든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읽는 것은 물론이며, 작가로서 책을 집필하고 제작자로서 출판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책들을 모아놓은 책방을 여는가 하면 책에 대한 토론도 즐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독서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책 읽는 즐거움을 나눈다. 활자를 접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목소리로 독자들을 만나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귀한 일
영화 ‘밀수’ 무대인사 일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박정민 배우는 얼마 전 ‘소리소리마소리’ 사업에서 두 번째 책을 녹음했다. ‘소리소리마소리’는 알라딘커뮤니케이션의 후원을 받아 2022년부터 한국장애인재단이 주관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오디오북 제작 사업이다. 지난해 40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100권의 오디오북을 만들어 국립장애인도서관에 기증하였다.
한국에서 비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 100권이라면 시각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대체자료(음성변환 및 점자 도서)는 약 6권 정도이다. 국립장애인도서관의 조사에 따르면 녹음도서는 시각장애인 10명 중 7명이 이용하고, 6명이 가장 필요하다고 응답한 대체자료 유형이다. 더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독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이 낭독봉사에 그가 참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활동 중에서 의미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디오북 낭독 봉사를 꾸준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해진 때에 규칙적으로 시간을 낼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보니 쉬는 시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활동이어야 했는데 그래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오디오북 녹음이었죠.”
한 권의 책을 녹음하는 데는 보통 20시간 정도가 걸린다. 책을 그저 소리 내 읽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책을 쓴 사람의 고민이나 의도, 말투를 종이 위의 건조한 활자만 놓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작가가 독자들을 가볍게 웃기고 싶었구나’ 싶은 구절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부분에서는 ‘심각하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는구나’ 싶은 곳이 있다. 작가의 호흡도 신경이 쓰인다. 읽다 보면 한국 작가가 쓴 책 중에서는 유달리 작가의 호흡이 잘 느껴지는 글도 있다. 이 경우 호흡을 잘 살려 읽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미세한 부분을 신경 쓰면서 책을 낭독하다 보면 목이 아파지기도 전에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혀가 굳는 느낌까지 든다.
그래서 박정민 배우는 녹음하기 전에는 책을 여러 번 읽거나 하는 준비보다는 체력관리에 신경을 쓴다고 말한다. 잠을 많이 자고 밥을 잘 챙겨 먹는 것이 장시간 녹음의 비결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오디오북 봉사자들은 한 번에 1~2시간 녹음을 하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지만, 박정민 배우는 한 번에 3~4시간씩 녹음을 한다. 바쁜 스케줄 상 자주 녹음실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작업량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보통의 집중력을 갖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우도 대본을 읽고 소리로 내용을 전달하는 직업인만큼 그 유사성에서 오는 수월함은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의외로 그는 오디오북 녹음과 연기 준비가 전혀 다른 작업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작품을 준비할 때는 오히려 대사를 소리내서 연습하지 않는다. 연기를 ‘외워서 하게 될까봐’ 걱정돼서다. 오히려 영화에서 해당 장면이 어떤 의미가 있고, 등장인물은 왜 그런 대사를 했을지 등을 깊게 고민하는 데 에너지와 감정을 많이 소모한다. 반면 낭독은 일정한 형식이 있는 글을 읽는 것이다 보니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정민 배우에게도 여러모로 이번 활동은 새로운 도전이었던 셈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까지
지난해 박정민 배우는 시각장애인 오디오북 제작사업 ‘소리소리마소리’의 스페셜 낭독 봉사자로 참여했다. 처음 낭독봉사에 동참하기로 결정하면서 소망했던 건 낭독 봉사자인 ‘지니 서포터즈’가 원활하게 모집되는 것이었다. 박정민 배우의 노력 덕분일까. 걱정이 무색할 만큼 결과는 좋았다. 서포터즈 이름 지니처럼 시각장애인에게 독서라는 선물을 나눠주고자 했던 선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 지니 서포터즈 모집에 500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소식을 인터뷰 중 처음 들은 그는 그저 담담하게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인터뷰 중 가끔씩 비친 박정민 배우의 모습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의 사람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혹시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까봐 늘 걱정한다. 재능 기부처럼 이타적인 일을 할 때조차도 그런 활동이 자신에 대한 홍보처럼 비춰지지는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오디오북 제작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제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왕이면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런 활동도 마치 시늉하는 거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어요. 내 직업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그런 게 싫어서, 또 이왕 의미있는 행동을 시작한 김에 꾸준히 해보고 싶어요.”
이런 노력이 이어짐으로써 그가 기대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장애인들을 위한 많은 콘텐츠가 생기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책, 과학책뿐만 아니라 철학 서적, 경제 서적 등 권수가 늘어난다면 시각장애인들이 접할 수 있는 세계가 그만큼 넓어지는 셈이니 말이다. 나아가 시각장애인들에게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도 그의 활동은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주는 선물같은 시간, 독서
쉽지만은 않은 오디오북 제작에 그가 이렇게 열정을 보일 수 있었던 건 기본적으로 책에 대한 애정이 깊게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민 배우가 처음으로 책에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 진학 이후였다. 그는 동네 서점에 있는 문방구에서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었다. 손님이 많이 없어 시간이 가질 않았는데,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을 때라 그나마 시간을 때울 수 있었던 활동은 책밖에 없었다. 그때 그가 처음 잡은 책은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생각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그 이후로 책을 꾸준히 읽으며 애정을 키워나갔다.
출처 : 문학동네 |
출처 : 동아시아 |
지난해 박정민 배우는 첫 번째 낭독에서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이름이 인상적이어서 관심을 갖게 된 책이었는데 심리 묘사가 매우 섬세해 좋아하는 책이다. 번역투의 문장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누구나 느껴봤을 법한 감정들을 세밀하게 표현해 놓아서 다른 사람들도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로 선택한 낭독 도서는 <궤도의 과학 허세>라는 과학 서적이다. 한때 과학 입문서에 심취했던 가닥을 살려 대중적인 과학책을 녹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책을 쓴 유튜버 ‘궤도’와 친분도 있다는 박정민 배우는 과학 대중화에 힘쓰는 작가의 집필 취지에도 공감해 이번 활동이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 일정이 규칙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에 책을 읽기는 어렵다. 보통 지방 촬영에 가서 대기하는 시간을 많이 활용한다. 숙소에 머물면서 휴대폰 게임도 가끔 하지만 1~2시간이 지나면 금방 지겨워진다. 그때가 가장 오랜 시간 집중해서 책 읽기 좋은 시간이다. 또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도 읽으려고 노력한다. 한 달에 1~2권은 꼭 책을 읽으려고 하는 편이며, 그가 독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독서를 하는 시간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돼요. 시간을 내서 누군가가 쓴 문장을 읽고 밑줄을 치고 거기서 영향을 받기도 하는. 그런 시간 자체와 그걸 즐기는 스스로가 좋아요. 유튜브, 넷플릭스처럼 즐길 게 너무 많은 세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요즘 시대에 더 필요한 행위가 아닐까 싶어요.”
다음에 낭독해보고 싶은 책으로는 이기호 작가의 책을 꼽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독서를 습관화하고 싶지만 계속 실패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그는 ‘독서 근육’을 키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서 근육이란 책을 꾸준히, 오롯이 읽어낼 수 있는 집중력과 지구력이에요. 근육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처음부터 ‘3대 500’을 치려고 하기보다는 2kg짜리 핑크색 아령을 들고 시작해야 하잖아요. 독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가볍게, 가볍게 재미있는 책부터 시작하면 근육이 점점 커지면서 일종의 ‘부심’이 생겨요. ‘아, 나 이정도의 책도 읽었어’ 이런 거죠. 몸이 좋아지면 더 많은 무게를 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관심이 가는 책부터 시작해야 해요. 만화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다고 봐요.”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독서라는 행위가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보편화되려면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함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 대체도서의 비중은 2019년 이미 전체 도서의 30%를 넘었다. 아직 한 자릿수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성적표는 너무 미비한 수준이다.
박정민 배우는 시각장애인과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의 소중한 가족 중 한 명이 3년 전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직접 '무제'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차려 ‘살리는 일’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의 가족은 그 책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사고가 난 지는 꽤 지났지만, 박정민 배우는 아직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시력을 잃은 가족을 위해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약간의 무력감도 지니고 있다. 그것이 그를 오디오북 녹음으로 이끈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시각장애인 오디오북 제작 사업을 통해 오디오북 100권이 새로 만들어졌지만, 시각장애인들은 그런 서비스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알기가 어려울 수 있다. 박정민 배우가 짧게나마 곁에서 본 시각장애인의 삶은 우선 책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어렵다. 우리가 항상 붙들고 있는 스마트폰도 이용하기 어렵고, 옆에서 누군가가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주로 정보를 얻는 창구는 TV나 유튜브 등 영상 플랫폼이다. 음성으로 원하는 정보를 검색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서비스는 그런 음성 및 영상 매체를 통해 많이 홍보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박정민 배우는 생각했다.
세상을 여는 틈 구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우선 구독자들이 ‘참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를 보게 될 사람들은 그의 팬이 아니라면 웹진에 올라오는 콘텐츠를 꾸준히 보는 사람들일 것이고, 그렇다면 장애인들에 대한 현실과 처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만 해도 벅찬데 나보다 힘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것임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이어가 보자는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전하였다. 그 역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봉사활동이라면 고등학교 시절 의무감에 했던 활동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작게나마 시작한 일을 최대한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 노력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더욱 힘이 날 것 같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스크린 속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느껴보고, 책 속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즐기는 박정민 배우. 그런 인생을 살게 된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 그는 이제 그 선물 같은 경험들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려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 같다. 묵묵히 배우의 길을 닦아온 것처럼 나눔의 길도 꾸준히 넓혀갈 그의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소망처럼 더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독서의 끝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기획 : 김주현, 선아
사진 : 김현진